文學,藝術/디자인·건축

'건축계 노벨상' 받은 인도 건축가, "그냥 집이란 건 없다"

바람아님 2018. 3. 10. 08:48

중앙일보 2018.03.08. 17:28

 

2018 프리츠커상, "진정성이 담긴 건축" 평가
인도 저소득층 위한 주택단지 개발 등 대표작
도쉬 "집 자체가 삶을 바꿀 수 있다"
도쉬가 설계한 아메다바드의 건축 전문학교(CEPT대학, 1966-2012). 자연광이 내부를 가득 채우고 있다.
[사진 The Pritzker Prize]
인도 아메다바드의 'CEPT' 외부 공간. 도쉬는 외부의 오픈된 공간에 지붕을 얹어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흐뜨러놓았다.
[사진 The Pritzker Prize]
"이곳들은 그냥 집이 아니다. 행복한 공동체가 살고 있는 가정이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 1989년 인도 중부 도시 인도르에 저소득층을 위해 주택단지를 설계한 인도 건축가 발크라쉬나도쉬(90)가 한 말이다. “내 평생 작품 활동의 목표는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힘을 북돋아주는 것”이라고 말한 그는 “집 자체가 삶을 바라보는 주민들의 시각을 변화시키고 삶을 달라지게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건축계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주관하는 하얏트 재단은 7일(현지시간) 인도의 대표적인 건축가이자 도시설계가이며 교육자인 도쉬를 올해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인도 건축가가 프리츠커상을 받은 것은 처음이다. 프리츠커 건축상은 세계 최대 호텔 체인 '하얏트'를 소유한 미국 시카고 부호가문 프리츠커 가(家)가 인류와 건축 환경에 의미 있고 일관적인 기여를 한 생존 건축가를 기리기 위해 1979년부터 시상해왔다.


9명으로 구성된 프리츠커상 심사위원단은 "도쉬의 건축은 화려하거나 유행에 좌우되지 않고 진지하다"며 "그는 사회에 기여하겠다는 열망과 깊은 책임감으로 공공 기관과 교육·문화 시설, 주택 등 다양한 건축물을 설계하며 높은 퀄리티와 진정성이 담긴 건축을 추구해왔다"고 말했다. 심사위원단은 또 "도쉬는 건축물이 자리하는 사회·환경·경제 맥락을 깊이 이해하고 이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왔다. 덕분에 그의 건축은 지속성(sustainability)까지 갖췄다"고 평가했다.

1989년 인도 인도르의 저소득층을 위해 설계한 주택단지 'Aranya Low Cost Housing'. 거리와 각 가구의 현관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배치했다. [사진 The Pritzker Prize]
Aranya Low Cost Housing. 도쉬는 "이곳들은 그냥 집이 아니다. 행복한 공동체가 살고 있는 가정이다. 그게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 The Pritzker Prize]
도쉬는 중부 도시 인도르에 8만 명 이상의 저소득층을 효과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주택단지를 개발(1989)한 것으로 유명하다. 각 집이 안마당(courtyard)과 복도를 통해 긴밀하게 연결돼 있는 이 단지엔 6500세대가 거주하고 있으며, 세대 당 크기도 원룸부터 더 넓은 면적까지 다양하다. 도쉬는 창의적인 공간 배치로 인구 밀도가 높은 지역 주민의 삶의 질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도쉬의 다른 대표작으로는 'CEPT 대학' (1966-2012), '타고르 기념관'(1967), '인도학 연구소'(1962), '생명 보험 조합 주택(1973) 등 다수가 있다.
올해 프리츠커상 수상자로 선정된 인도 건축가 도쉬. 1927년생이다. [사진 The Pritzker Prize]
수상 소식을 들은 도쉬는 "인도 정부와 지자체가 좋은 건축, 바람직한 도시 설계에 대한 뜻이 있었기 때문에 실현 가능한 일이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지난 60년 동안 농촌에서 작품 활동을 하다가 인도의 미래를 걱정하며 저가주택을 설계했다”며 "이제 그들에게는 집이 생겼고, 삶은 달라졌으며, 희망을 품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번 수상은 저의 스승 르 코르뷔지에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며 "그의 가르침은 저로 하여금 인도 건축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질문하게 했으며, 지역민에 맞는 주택을 설계하며 현대적인 표현을 할 수 있도록 자극을 주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도쉬는 현대 건축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1887~1965)와 루이스 칸(1901~1974)으로부터 받은 영향을 현지 환경과 감성과 맞게 독자적으로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27년 인도 마하라슈트라 주 푸네에서 2대에 걸쳐 가구 제조업을 해온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뭄바이대 건축학과를 졸업했다.

인도 방갈로르에 있는 인디안 인스튜티튜트 오브 매니지먼트(1977-1992).
51년 런던을 거쳐 파리로 건너가 그곳에서 스위스 태생의 유명 프랑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와 함께 일했다. 54년 르 코르뷔지에가 맡은 찬디가르 신도시 계획 프로젝트를 돕기 위해 54년 인도로 돌아왔으며, 60년대에는 '인디안 인스티튜트 오브 매니지먼트'(IIM) 프로젝트 등에 참여하며 미국 필라델피아 출신의 거장 건축가 칸과 함께 일했다. 이후 그는 아마다바드에 건축 전문 대학(SAP·CEPT대학으로 이름 변경)을 설립했으며 미국 일리노이대 방문 교수를 지내는 등 해외 곳곳에서 강의해왔다.


도쉬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프로젝트로 꼽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자신의 설계 스튜디오인 '산가스'(1980)다. 이곳은 자연광이 잘 들어오고, 지역 특유의 더운 날씨를 식히기 위해 입구 주변엔 물가도 조성돼 있다. 재료의 60% 이상은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것을 썼으며, 이 지역의 장인이 직접 만든 타일로 마감됐다. 세계적인 건축 평론가 윌리엄 J R 커티스는 "서로 다른 규모의 공간이 하나로 완성된 이 스튜디오는 하나의 실험적인 예술 작품이 됐다. 길 가던 농부와 지역 노동자들조차 이곳을 찾아 쉬면서 이 건물을 즐겨 감상한다"고 쓴 바 있다.

도쉬의 설계 스튜디오 '산가스'. 인도 특유의 기후와 환경, 문화, 생활방식을 잘 반영한 건축으로 평가된다. 도쉬 스스로 가장 심혈을 기울여 설계한 건축 중 하나로 꼽는 곳이기도 하다. [The Pritzker Prize]
프리츠커 심사위원단은 "그의 건축은 시(詩)적인 동시에 기능적"이라는 평가도 덧붙였다. 그의 건축엔 인도 역사와 문화에 대한 존중, 사원과 북적거리는 거리, 할아버지의 목공소 등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녹아들어 있다는 설명이다. 건축에 대한 그의 신념도 눈길을 끈다. "건축에는 사회적인 생활방식과 신념을 반영돼야 한다"고 말하는 그는 인도 건축에 중요한 세 가지로 요소로 '마을 광장', '가게들', '안마당'을 꼽았다.


전봉희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는 "2015년 프라이 오토에게 프리츠커상을 준 데 이어 90대의 건축가를 선정한 것은 프리츠커상이 생애에 걸친 작업 전체에 대한 평가에 무게 중심을 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전 교수는 또 "최근의 수상자 면면을 보면 요즘 다핵화되어가는 세계의 지역성 특성을 인정하고, 건축의 공공적 성격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더 뚜렷해졌다"고 말했다.


2013년 수상자인 중국 건축가 왕슈가 지역성에 기반을 둔 '토종 건축'으로 주목받았다면, 2014년 수상자인 일본 건축가 반 시게루는 '재난 건축가', 2015년 수상자인 오토 프라이는 '생태 건축가', 2016년 수상자인 칠레의 알레한드로 아라베나는 '사회 참여 건축가' 등으로 불린다. 지난해 역시 스페인 카탈루냐에서 30여년간 지역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협업해온 무명의 스페인 건축가 3인조가 수상했다. 휴머니티에 방점을 찍고 사회에 의미 있는 기여를 해온 건축가를 발굴하겠다는 재단 측의 의지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올해 시상식은 오는 5월 캐나다 토론토의 아가칸 뮤지엄에서 열리며, 도쉬는 이번 수상으로 상금 10만 달러(약 1억1000만 원)와 청동 메달을 받는다. 프리츠커상 수상자는 미국이 8명으로 가장 많고, 이어 일본 6명, 영국 4명 등이다.


이은주 기자 jule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