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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재기의 천년향기] (17)최고의 유물, 최악의 발굴..무덤 주인은 말없이 이름을 알렸다

바람아님 2018. 10. 29. 07:18

경향신문 2018.10.27. 06:01


공주 무령왕릉

충남 공주의 무령왕릉은 출토 유물로 무덤 주인이 확인된 삼국시대의 유일한 왕릉이다. 4600여 점의 유물이 나와 백제사는 물론 한국사의 ‘보물창고’로 평가받는다. 사진은 무령왕릉 내부(복원모형)로 다양한 무늬의 흙벽돌, 등잔이 있던 감실, 감실 아래에 창문을 형상화한 가짜 창문이 보인다.

배수로 공사 중 발견돼 17시간 만에 부실하게 끝낸 발굴…그럼에도 이곳은 삼국시대 왕릉 중 주인공이 확인된 유일한 왕릉이다 지석에 적힌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무령왕릉 유물은 6세기 초반 삼국시대 유물 연구의 기준이 됐다


역시 다르다. 저 먼 고대의 무덤이 모여 있는 고분군 유적은 일반 역사유적과는 색다른 감흥을 안긴다. 최고 지배자였던 왕의 무덤, 왕릉은 더하다. 왕릉 앞에 서면 저절로 삶과 죽음을 떠올리게 된다. 죽음, 곧 삶의 다른 얼굴을 통해 새삼 살아가고 있다는 것, 인간 삶의 유한성을 실감한다. 개선하는 로마제국 장군을 향해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를 속삭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여러 생각이 꼬리를 이어가면 결국은 어떻게 살 것인가로 모아진다. 살아감의 의미를 되새김질하는 곳이 옛 무덤 유적이다.


충남 공주의 ‘송산리 고분군’(사적 13호)을 찾았다. 무령왕릉을 만나기 위해서다. 꽤 오랜만에 찾은 무령왕릉, 여전했다. 깊어가는 가을 속에 둥그런 봉분도, 웅숭깊은 분위기도 변함이 없다. 관람객들이 북적이지만 무령왕릉은 오히려 묵직한 침묵으로 돋보인다. 1400여년의 시간을 품은 문화유산의 깊은 향기가 은은하다.


■ 한국사의 보물창고

무령왕릉이 있는 송산리 고분군은 백제가 웅진(공주)에 도읍할 당시 왕, 왕족의 무덤이 모인 곳이다. 기원전 18년 건국된 백제는 660년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게 무너질 때까지 세 곳에 수도를 삼았다. 한성(서울) 도읍기가 첫번째로 서울 풍납토성(사적 11호)에 왕성을 뒀다. 당시 백제는 지금의 경기도와 충청도·전라도 일대까지 장악하는 등 전성기를 누렸지만 고구려의 남진정책에 밀려 서울을 떠나야 했다. 475년 한성에 이어 자리 잡은 곳이 금강을 낀 웅진이다. 웅진은 백제가 마지막이자 세번째 수도인 사비(부여)로 옮긴 538년까지 공산성(사적 12호)에 왕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475~538년 사이 공주를 터전으로 삼은 동안 송산리 고분군이 조성된 것이다.


백제 유적으로서 송산리 고분은 일찍 주목받았다. 일제강점기 당시 조사가 벌어졌으나 관련 기록이나 유물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제대로 된 발굴조사라기보다 유물에 눈이 먼 도굴 같은 조사여서다. 당초 17기의 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송산리 고분군은 현재 1~6호분, 그리고 무령왕릉까지 모두 7기가 복원돼 있다. 무령왕릉은 5, 6호분 뒤편에 자리한다. 5호분은 다른 고분과 같이 굴식 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이며, 6호분은 무령왕릉처럼 흙을 구운 벽돌로 만든 벽돌무덤(전축분)으로 사신도가 그려져 있는 벽화고분으로도 주목받는다.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 계묘년 오월칠일에 돌아가 을사년 팔월십이일에 대묘에 예를 갖춰 안장하다

무령왕릉은 발견과 발굴조사를 둘러싼 일화, 논란도 많다. 발견은 극적이었으며, 발굴은 한국 고고학사에 큰 오점으로 남아 길이 교훈을 전해줄 만큼 부실했다. 무령왕릉이 1400여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71년 7월5일이다. 장마를 앞두고 6호분 침수를 막기 위한 배수로 공사 도중 발견됐다. 이후 발굴조사단이 급히 구성됐고 7월8일 오후부터 발굴조사가 진행됐다. 하지만 발굴조사는 조사단의 경험이나 능력 부족, 언론사들의 지나친 취재경쟁 등으로 급하게 이뤄졌다. 발굴조사의 기본인 실측, 사진촬영 등도 부실했다. 지금으로 보면 적어도 몇개월, 몇년이 걸릴 백제 왕릉 발굴이 불과 하룻밤을 지새우며 17시간 만에 끝난 것이다. 심지어 출토 유물을 청와대로 옮겨 대통령이 마음대로 만지는 있을 수 없는 일까지 벌어졌다.


부실한 발굴조사였지만 무령왕릉은 백제사, 나아가 한국사나 동북아시아 역사에서 그 어떤 수식어를 붙여도 부족할 만큼 가치가 크다. 우선 삼국시대 왕릉 가운데 출토된 유물로 무덤 주인공을 확인한 유일한 왕릉이다. 백제 제25대 무령왕과 왕비가 그 주인공이다. 고구려나 신라, 백제의 왕릉들이 남아 있지만 피장자를 명확히 아는 능은 없다. 경주에 있는 30여기의 신라 왕릉 중 흔히 ‘○○왕릉’이라고 부르지만 출토된 유물로 확인된 것은 아니다. 다만 태종무열왕릉, 흥덕왕릉은 비석과 관련한 유물이 있어 그나마 신빙성이 높을 뿐 나머지 왕릉들은 출토 유물이 아니라 문헌기록, 능의 구조·형식 연구에 따른 추정이다.


무덤 주인의 확인은 왕릉의 축조 연대, 왕릉 속 유물의 제작시기 등 유적·유물의 절대연대가 파악됐다는 의미다. 다른 유적·유물 연구의 비교 기준이 된다는 뜻이다. 무령왕릉 유물들은 지금 6세기 초반 삼국시대 유물 연구의 기준이 되고 있다. 무령왕릉은 또 도굴되지 않았다. 한국의 고대 무덤들은 일제강점기부터 대부분 훼손되거나 도굴당했다. 그런 와중에 무령왕릉의 등장은 기적에 가까웠다.

(왼쪽위부터 반시계방향으로)1 무령왕비 은팔찌 한 쌍 2 무령왕비 금귀걸이 3 무령왕비 금제관식 4 무령왕비 베개 5 무령왕릉 지석 6 무령왕릉 석수 7 무령왕 금제 뒤꽂이 8 무령왕 금제관식 9 무령왕 금귀걸이

■ 백제를 다시 보게 만든 유물들

무령왕릉에서는 다양한 유물 4600여점이 나왔다. 국보만도 12건이다. 크기와 형태·무늬가 다른 28가지의 벽돌을 사용해 아름답게 조성한 왕릉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하나같이 웅진시대 백제를 그려볼 수 있게 하는 소중한 보물들이다.


유물은 모두 귀중하지만 그래도 첫손에 꼽을 것은 아무래도 국보 163호인 ‘무령왕릉 지석(誌石)’이다. 지석은 무덤 주인의 행적 등을 새겨놓은 돌판을 말한다. ‘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라는 명문으로 시작하는 무령왕릉 지석은 2장이다. 이 지석의 명문으로 무령왕릉임을 비로소 알게 됐다. 지석에 따르면, 무령왕은 62세 때인 523년 5월7일에 사망해 27개월 뒤인 525년 8월12일에 안장했으며, 무령왕비는 526년 11월에 사망해 역시 27개월 뒤인 529년 2월에 기존 무령왕릉을 다시 열어 무령왕 옆에 안치했다. 지석은 무령왕릉 확인 외에도 당시 백제의 사회·문화상과 관련된 여러 정보를 주고 있다.


무령왕과 왕비의 관장식도 있다. ‘무령왕 금제 관식’(국보 154호)은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불꽃무늬와 연꽃무늬 등에 100여개에 이르는 달개를 금실로 달아 역동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무령왕비 금제 관식’(국보 155호)은 연꽃무늬를 중심으로 정적이면서 단아하다. 백제는 신라와 달리 금관이 아니라 비단 모자를 썼기에 그 모자에 장식한 것으로 보인다.


머리에 꽂는 장식물인 ‘무령왕 금제 뒤꽂이’(국보 159호)는 현대적 미감까지 느껴지는 세련된 디자인이다. 세 가닥의 꼬리에 날개를 활짝 펴고 나는 새를 형상화한 듯하다. 왕 부부의 금귀걸이도 발견됐는데 ‘무령왕 금귀걸이’(국보 156호)는 두 줄을, ‘무령왕비 금귀걸이’(국보 157호)는 한 줄을 장식하고 있다. 무령왕과 관련된 유물은 이밖에 시신의 발을 올려놓은 ‘무령왕 발받침(족좌)’(국보 165호)을 비롯해 최고 지배자를 상징하는 둥근고리자루큰칼(환두대도), 금동신발, 허리띠 장식 등이 있다. 무령왕비 유물로는 한쌍의 ‘은팔찌’(국보 160호)가 주목된다. 은팔찌 안쪽에 ‘庚子年二月多利作~’(경자년이월다리작~)으로 시작되는 명문이 있다. 명문을 놓고 여러 해석이 있지만 ‘다리’라는 장인이 520년 왕비를 위해 만든 것이라는 주장이 유력하다. 정제미가 두드러지는 ‘무령왕비 금목걸이’(국보 158호), 왕비의 머리를 받친 ‘무령왕비 베개’(국보 164호), 금동신발 등도 출토됐다.


무령왕릉에서는 또 돌로 상상의 동물을 형상화한 ‘무령왕릉 석수’(국보 162호)도 나왔다. ‘진묘수’로 불리는 이 동물상은 무덤 입구에서 외부의 사악한 기운이나 잡귀 등을 막아내는 상징적 유물이다. 이 석수는 오른쪽 뒷다리가 부러진 채 발견됐는데 중국에서 출토되는 상당수 진묘수들도 뒷다리 한쪽이 훼손돼 있어 당시 의례의 하나로 추정된다.


청동거울(국보 161호)을 비롯한 청동 유물도 많다. 정교하고 화려한 선각이 돋보이는 ‘동탁은잔’, 다리미, 그릇과 수저, 내부에 연꽃과 물고기 무늬가 선명한 잔 등이 대표적이다. 또 왕과 왕비의 나무관, 금·은판을 잘라 만든 다채로운 형태·무늬의 장식품들, 수많은 유리구슬과 금구슬, 유리로 만든 2점의 인물상 등도 있다. 특히 치아도 발견돼 화제를 모았는데, 30대 여성으로 조사돼 왕비와의 관련성이 주목받는다. 왕릉 벽면에 조성된 5개의 감실에는 불을 밝힌 백자잔(청자라는 주장도 있다)이 남아 있었다. 그 속에는 타다 남은 심지도 있는데, 당시 들기름·유채기름 등 식물성 기름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됐다.


무령왕릉의 유물들은 당시 백제인들의 사상이나 가치관, 사후세계에 대한 관념 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주목받을 또 다른 점도 있다. 벽돌무덤의 무령왕릉 구조가 중국 남조 양나라 지배계층 무덤의 전형적 양식이다. 또 백제 도자기가 아니라 여러 종류의 중국제 도자기, 쇠로 만든 동전인 중국의 오수전 등이 나왔다. 왕과 왕비의 널 재료인 나무는 일본 특산인 금송(金松)이다. 이는 당시 백제가 중국, 일본과 활발한 교류를 했음을 잘 말해준다. 백제의 개방적인 국제성이 드러난다는 분석이다. 백제 문화사를 풍부하게 복원하게 한 무령왕릉. 무령왕릉은 보존상 1997년 내부 관람이 중단됐고, 대신 ‘송산리고분군 모형전시관’에서 무령왕릉 내부 등의 체험이 가능하다. 진품 유물들은 인근 국립공주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사진 | 문화재청·국립공주박물관 제공

문화에디터 도재기 기자 jaeke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