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歷史·文化遺産

연해주 독립운동의 代父가 떠난 곳엔 잡초만…

바람아님 2018. 11. 1. 07:10
조선일보 2018.10.31 03:01

[내년 3·1운동 100주년… 독립운동 유적지를 가다] [上] 연해주
'연해주 한인 지도자' 최재형

내년은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만세운동 이전에도 독립운동의 싹은 트고 있었다. 러시아 연해주와 중국 간도가 대표적이다. 19세기 중엽부터 한인 이주가 시작된 이 지역은 나라를 되찾기 위한 전진기지 역할을 했다. 지난 22~27일 한민족평화나눔재단(이사장 소강석 새에덴교회 목사) 탐방단과 함께 두만강 700리, 압록강 800리에 걸친 독립운동 유적을 돌아봤다.

‘연해주 독립운동 대부’최재형이 순국한 장소로 알려진 우수리스크 외곽 사베스카야 언덕엔 아무런 표지 없이 잡초만 우거져 있었다.
‘연해주 독립운동 대부’최재형이 순국한 장소로 알려진 우수리스크 외곽 사베스카야 언덕엔 아무런 표지 없이 잡초만 우거져 있었다. 뒤에 보이는 십자가는 최 선생과는 무관하게 러시아 정교회가 세운 것이다. /김한수 기자
바람이 찼다. 빗방울도 흩뿌렸다.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시(市) 북쪽 외곽 사베스카야 언덕. 이곳은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1858~1920)이 순국한 것으로 알려진 장소다.

최재형의 일생은 한 편의 드라마다. 고향은 함경북도 경원. 어려서 가족을 따라 두만강을 건넌 그는 맨손으로 거부(巨富)가 됐고, 연해주 한인 사회의 지도자가 됐다. 학교를 설립하고 신문을 발행했으며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했다.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뒤에도 최재형이 있었다. 한때 '연해주 한인 중 최재형의 원조를 받지 않은 자가 없다'는 말이 있었고, 1919년 상해임시정부에선 초대 재무총장으로 추대될 정도로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쏟았다.

1920년 4월 4일 연해주를 덮친 일본군은 최재형을 비롯한 한인과 러시아인 240명을 기습 체포해 총살했다. '4월 참변'이다. 정부는 1962년 최재형에게 건국훈장을 추서했지만 그는 국내에선 '잊힌 영웅'이다. 마을에서 비포장길로 10분을 걸어 올라야 하는 이 언덕엔 잡초만 무성할 뿐 작은 비석 하나 없어 쓸쓸했다.

최근에야 재조명받는 최재형(위 사진) 선생과, ‘헤이그 밀사’3인 중 한 명인 이상설 선생의 유해를 뿌린 우수리스크 강가에 선 유허비.
최근에야 재조명받는 최재형(위 사진) 선생과, ‘헤이그 밀사’3인 중 한 명인 이상설 선생의 유해를 뿌린 우수리스크 강가에 선
유허비.
헤이그 밀사 중 한 명으로 잘 알려진 이상설(1870~1917). 그의 마지막 활동 무대가 연해주였다는 사실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우수리스크 남쪽, 자동차로 30분 거리 수이푼 강변엔 이상설 유허비(遺墟碑)가 서 있다. 유허비엔 누군가 놓아둔 국화 송이가 늦가을 비를 맞고 있었다. 1907년 헤이그에서 외교활동이 실패로 끝나자 이상설은 연해주로 건너와 독립운동을 벌였다. 1917년 병을 얻자 그는 광복의 꿈을 이루지 못한 마당에 고혼(孤魂)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없다며 모두 태워 강에 뿌리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러시아 연해주 순례는 미안함의 연속이다. 잊고 살아온 데 대한 미안함. 연해주는 초기 독립운동의 요람이었다. 1860년대부터 먹고살기 위해 두만강을 건넌 한인들은 당시 해삼위(海蔘威)로 불린 블라디보스토크 외곽에 집단 거주촌인 '개척리'와 '신한촌(新韓村)'을 건설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만 한인이 1만명에 이르렀고 북쪽 우수리스크, 남쪽 크리스키노에도 한인 마을이 생겼다. 나라의 운명이 기울면서 의병장 유인석을 비롯해 신채호 장지연 이상설 안중근 등 애국지사들이 연해주를 찾아 독립운동 단체를 만들었다. 군대를 모아 두만강 건너 일본군을 공격하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보름 후 이곳에서도 한인들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연해주 독립운동사가 잊힌 것은 아픈 현대사와 관련 깊다. 1937년 스탈린이 연해주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고, 2차대전 후엔 냉전의 벽이 가로막았다. 탐방단은 구소련 붕괴 후 옛 땅으로 돌아온 고려인 후손을 만날 수 있었다. "원동(遠東)이 좋았다"는 부모의 기억을 좇아 연해주로 돌아온 후손들은 "우리 세대는 자식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쳤지만 말을 쓸 대상이 없다 보니 자식들이 우리말을 잊고 역사도 배우지 못했다"고 했다. 다행히 1990년대 이후 광복회, 고려학술문화재단, 재외동포재단 등이 나서 유적을 복원하고 기념비를 세우고 한인 이주 140주년 기념관도 세웠다. 그러나 여전히 수많은 유적을 위치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 블라디보스토크가 관광지로 부상하면서 신한촌 기념비 등엔 방문이 늘고 있지만 다른 곳은 아직 발길이 뜸했다. 소강석 목사는 "더 많은 젊은이들이 연해주 유적지를 찾아 선조들의 얼을 느끼고 배울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