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8.10.31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2009년 6월 24일,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최완규 소장과 이문형 책임연구원 등은 전북 고창 봉덕리에서
고분 발굴을 시작했다. 조사 대상인 1호분은 길이가 70m, 높이가 8m에 달하는 큰 무덤이었다.
1차 조사 때 석실 3기와 분구 둘레의 도랑을 확인했기에 추가 조사에 나선 것이다.
8월 말 석실 사이의 선후를 밝히려 조사 구역을 확장하던 중 몇 개의 돌이 삽날에 걸렸다.
주변 흙을 걷어내며 노출하자 크고 작은 돌들이 네모난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이 연구원은 일순간 제단일 가능성을 떠올렸지만 조사 결과 아니었다.
그 아래엔 무덤 덮개돌 2개가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교란 흔적이 없었기에 기대감은 커져 갔다.
금동식리, 봉덕리 1호분 4호 석실,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도르래를 설치하고 조심스레 체인을 당기자 덮개돌이 조금 들리며 컴컴한 석실 내부가 속살을 드러냈다.
숨죽이며 지켜보던 최 소장은 반짝이는 유물 실루엣을 확인하곤 덮개돌을 원위치에 내려놓으라고 다급하게 지시했다.
오랜 세월 고분 발굴을 주도한 베테랑의 '감(感)'이었다. 그 감은 적중했다.
급격한 환경 변화로 유물이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 전문가들과 함께
조사를 이어간 것은 9월 초의 일이다. 덮개돌을 제거하고 내려다보니 석실 안은 1500년 전 무덤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로 깨끗했고 바닥 전면에 유물이 쫙 깔려 있었다.
유해에 착장하였던 장신구와 대도, 동제잔과 받침, 중국 남조에서 들여온 청자, 왜에서 만든 제의용 토기,
야장의 심벌 단야구(鍛冶具)가 포함되어 있었다. 압권은 주인공의 발에 신겼던 금동식리였다.
보존 상태가 완벽해 육안으로도 인면조, 봉황 등 화려한 무늬가 한눈에 들어왔다.
조사단은 이 석실이 5세기 후반에 축조되었으며 마한 전통을 계승한 백제 지방사회의 유력자가 묻힌 것으로 추정했다.
한·중·일 세 나라 유물이 한곳에서 발견된 점도 이채로울 뿐만 아니라 출토 맥락이나 보존 상태까지 완벽해
이 무덤은 동아시아 고고학 연구의 기준 자료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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