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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인 세번이면 호구?···부인과 동침한 스님 참았더니

바람아님 2018. 11. 18. 07:33

[중앙일보] 2018.11.16 07:00


[더,오래] 권도영의 구비구비 옛이야기(20)
어느날 텔레비전을 보다가 1학년쯤 되는 아이가 담담하게 분노조절장애라는 전문용어를 말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사진 pixabay]

어느날 텔레비전을 보다가 1학년쯤 되는 아이가 담담하게 분노조절장애라는 전문용어를 말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사진 pixabay]

 
어느 날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가 시골에서 할머니와 세 동생과 함께 사는 초등학교 6학년 아이가 인터뷰하는 장면을 보았다. 아이가 1학년쯤 되었을 때 부모가 이혼하면서 네 형제가 할머니와 함께 살게 됐던 모양이다. 아이에겐 큰 시련이었을 텐데, 아마도 이 때문에 마음에도 병이 생겼나 보다.
 
아이가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 “제가 분노조절 장애가 있잖아요. 그런데 수영도 하고 할머니가 잘 보살펴주셔서 지금은 좀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요.” 대강 이런 내용이었다. 6학년 아이에게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분노조절 장애라는 전문용어(?)가 튀어나오는 것이 요즘 세상이다.
 
이 아이야 의사나 상담사에게서 들어서 그렇게 알고 있는 것이겠지만, 일반인 사이에서도 아주 흔히 쓰는 말이 되어 버렸다. ‘분노조절 장애’. 정신의학 분야에서 정식으로 쓰이는 명칭은 ‘외상 후 격분 장애(post-traumatic embitterment disorder)’다.
 
‘정신적 고통이나 충격 이후에 부당함·모멸감·좌절감· 무력감 등이 지속해서 빈번히 나타나는 부적응 반응의 한 형태’로 설명된다.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생각으로 증오와 분노의 감정 상태가 지속하는 장애를 말한다.
 
분노조절 장애 증상이 발현된 상사뱀
강서구 PC방 살인사건의 가해자 김성수 씨는 지난달 14일 서비스가 불친절하다는 이유로 아르바이트생을 흉기로 찔러 숨지게 했다. 사진은 목숨을 잃은 아르바이트생을 추모하는 공간에 한 시민이 국화와 쪽지를 놓고 있는 모습이다. <저작권자 ⓒ 1980-2018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강서구 PC방 살인사건의 가해자 김성수 씨는 지난달 14일 서비스가 불친절하다는 이유로 아르바이트생을 흉기로 찔러 숨지게 했다. 사진은 목숨을 잃은 아르바이트생을 추모하는 공간에 한 시민이 국화와 쪽지를 놓고 있는 모습이다. <저작권자 ⓒ 1980-2018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그동안 상사뱀 이야기를 몇 차례 했었는데, 이들이 자신의 사랑이 거부당한 데 좌절해 자신의 존재 자체를 버리고 뱀의 형상을 갖게 되는 서사가 이러한 증상으로 발현된다고 할 수 있다. ‘거부당한’ 혹은 ‘무시당한’ 사건의 주체가 부당하다고 해석하면서 이에 대해 격분하는 것이다. 이러한 격분은 자신의 존재 자체까지 변형시킬 만큼 위력을 갖는다.
 
살인사건이 일어났을 때 범행 현장에서 살인의 의도를 파악하는 주요 단서 중 하나가 상해를 입힌 정도일 것이다. 최근에 일어난 살인 사건에서도 얼굴에 72차례나 공격당했다는 흔적이 있다는 것 때문에 대중의 격분이 이어지기도 했다.
 
‘참을 인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는 속담이 생겨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배경이 된다. 옛날에 어느 농부가 장가를 갔는데, 부인은 공부를 좀 했고 이 남자는 아주 무식했다.
 
부인은 남편에게, “여보, 인위지덕(忍爲之德)이면 잘 살 수 있다는데 무슨 일이 생겨도 그저 참으시오. 열 가지고 백 가지고 참으면 다 잘 살 수 있답니다” 하고 늘 가르쳤다. 남편은 산에 일하러 다니면서도 부인이 인위지덕이면 잘 살 수 있다고 한 말을 떠올리면서 항상 “인위지덕, 인위지덕” 하며 다녔다.
 
하루는 궂은 비가 오면서 산에 안개가 가득 끼어 더는 일을 할 수 없게 됐다. 그동안 나무한 것을 짊어지고 평소보다 좀 이른 시간에 집에 돌아왔는데, 마당에 나뭇짐을 벗어 놓고 방에 들어가려다 보니 남자 짚신이 한 켤레 딱 놓여 있었다. 그래서 문구멍으로 방 안을 들여다보니 머리를 홀딱 깎은 사람이 하나 부인과 나란히 누워서 자는 것이었다.
 
남편이 화가 잔뜩 나서 문고리를 막 잡아당기려다 '인위지덕'이라는 말이 떠올라 화를 가라앉히고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부인과 함께 있던 사람은 여자 중이었다. 인위지덕 덕분에 살인을 면하게 된 것이다. [중앙포토]

남편이 화가 잔뜩 나서 문고리를 막 잡아당기려다 '인위지덕'이라는 말이 떠올라 화를 가라앉히고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부인과 함께 있던 사람은 여자 중이었다. 인위지덕 덕분에 살인을 면하게 된 것이다. [중앙포토]

 
남편은 화가 잔뜩 나서 이놈을 도끼로 때려잡는다며 문고리를 쥐고 막 잡아당기려다가 ‘인위지덕’이라는 말이 떠올라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섰다. 그래도 분이 나서 다시 문고리를 잡고 들어가려다 또 물러섰다 그러길 세 번을 하고는 일단 ‘인위지덕’을 마음에 새기고는 짐짓 큰기침하면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방 안에서 잠자던 부인과 함께 있던 사람이 기침 소리에 눈 비비며 일어나는데, 머리 깎은 사람은 여자 중이었다.
 
부인이 밭에서 일하다가 산에서 내려온 이 중을 만났다는 것이다. 마침 비가 내리고 하니 집에 가 점심이나 먹고 가라고 하면서 중과 함께 집에 왔다고 했다. 그러고는 잠시 낮잠을 잤던 모양인데, 그 사이 남편이 돌아와 그 모습을 보고는 부인이 웬 놈이랑 대낮부터 동침하는 줄 알고 큰일을 낼 뻔했다.
 
부인과 남편의 이야기를 다 들은 중은 “오늘 내가 죽을 뻔했는데 인위지덕 때문에 살았으니까 내가 내 재산을 반을 나눠 주겠다”고 말했다. '참을 인' 자를 떠올린 덕에 살인을 면하고 재산도 얻게 된 이야기이다.
 
공자님 말씀에도 등장한다. “모든 행실의 근본은 참는 것이 으뜸이다(百行之本 忍之爲上).” 제자 자장이 몸을 닦는 말 한마디를 내려달라고 청하자 전한 말이라고 한다.
 
자장이 무엇 때문에 참아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공자는 “천자가 참으면 나라에 해가 없고(天子忍之國無害), 관리가 참으면 그 지위가 올라가고(官吏忍之進基位), 형제가 참으면 집안이 부귀해지고(兄第忍之家富貴), 부부가 참으면 일생을 해로할 수 있고(夫妻忍之終基世), 친구 간에 참으면 명예를 더럽히지 않고(朋友忍之名不廢), 자신이 참으면 재앙이 없을 것(自身忍之無禍害)”이라고 했다.
 
위의 이야기에서는 자신이 참아 재앙을 피하게 된 서사를 보여준다. 그런데 이때, 진짜 ‘참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TV프로 무한도전에서 개그맨 박명수 씨가 남긴 어록 '참을 인이 세 번이면 호구 된다.' 이는 기존의 상식을 비트는 표현이기에 한 번쯤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이게 잘못되어 '참으면 나만 손해'라는 생각을 심어주게 될 수도 있다. [중앙포토]

TV프로 무한도전에서 개그맨 박명수 씨가 남긴 어록 '참을 인이 세 번이면 호구 된다.' 이는 기존의 상식을 비트는 표현이기에 한 번쯤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이게 잘못되어 '참으면 나만 손해'라는 생각을 심어주게 될 수도 있다. [중앙포토]

 
이제는 종영해 볼 수 없는 TV 프로 ‘무한도전’에서 개그맨 박명수 씨가 남긴 어록이 지금도 화자 되고 있다. 그중 유독 눈에 띄는 것이 “참을 인이 세 번이면 호구 된다”였다. 이는 '참을 인'자 셋이면 살인도 피한다’는 속담을 비튼 것이다.
 
꾹 참다 보면 심각한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상황을 피할 수 있다는 속담이 박명수의 입을 통해서는 요즘 세상에서는 참다 보면 호구 되기에 십상이라는 가치관으로 드러났다. 대중은 그의 캐릭터에 기대어 이 말에 대해 통쾌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기존의 상식적인 생각을 비트는 표현이었기에 한 번쯤 그런 생각을 품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나, 그런데 또 이게 잘못되면 ‘참으면 나만 손해’라는 생각을 심어주게 되어 버린다. 더구나 불황 속에 안 그래도 먹고살기도 힘든데 나만 손해 보며 살 순 없다는 생각, 혹은 ‘나만 아니면 돼’ 하는 가치관이 더더욱 세상을 각박하게 만드는 것 같다.
 
가면 쓰기란 ‘사회적 기술’ 필요한 사회
그러나 사회에서 내 감정을 다 표출하며 사는 것은 쉽지 않다. '사회적 기술'에는 '가면 쓰기'가 요구된다. 적당히 섞여들고 적당히 호감을 얻어 내야 사람 좋고 믿을 만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중앙포토]

그러나 사회에서 내 감정을 다 표출하며 사는 것은 쉽지 않다. '사회적 기술'에는 '가면 쓰기'가 요구된다. 적당히 섞여들고 적당히 호감을 얻어 내야 사람 좋고 믿을 만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중앙포토]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혼란스럽다. 그렇다고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다 드러내며 살다가는 이 사회에서 발붙이고 살기가 쉽지 않다. 분노와 격분을 포함해 어떤 감정이든 그냥 표출해 버리는 것은 어른스럽지 못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세상 살아가는 데 필요한 ‘사회적 기술’에는 ‘가면 쓰기’가 요구된다. 포커페이스, 혹은 페르소나. 적당히 가리고 꾸며서 적당히 섞여들고 적당히 호감을 얻어 내야 사람 좋고 믿을 만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참을 인이 세 번이면 호구 되는 세상,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 호구 되기를 자처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직장 상사 혹은 회장님이라고 해서 나를 짓밟고 사람들 다 보는 데서 마구 걷어차고 주먹질을 해대는데도 참아 왔다. 술만 마시면, 혹은 끊임없이 의심을 해대며 죽을 만큼 폭행을 일삼는 남편을 참으며 살아왔다. 왜? 무엇을 위해서?
 
‘참을 인 세 번’이 필요한 상황이 있고 그렇지 않은 상황이 있다. ‘무조건 참아라’도 안 되고, ‘무조건 참지 마라’도 안 된다. 어떤 때 어떤 태도를 갖추어야 할지 사태 파악을 할 수 있는 냉철한 눈이 필요할 때가 아닐까.
 
권도영 건국대학교 서사와문학치료연구소 초빙교수 irhett@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