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 권도영의 구비구비 옛이야기(20)
어느 날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가 시골에서 할머니와 세 동생과 함께 사는 초등학교 6학년 아이가 인터뷰하는 장면을 보았다. 아이가 1학년쯤 되었을 때 부모가 이혼하면서 네 형제가 할머니와 함께 살게 됐던 모양이다. 아이에겐 큰 시련이었을 텐데, 아마도 이 때문에 마음에도 병이 생겼나 보다.
아이가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 “제가 분노조절 장애가 있잖아요. 그런데 수영도 하고 할머니가 잘 보살펴주셔서 지금은 좀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요.” 대강 이런 내용이었다. 6학년 아이에게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분노조절 장애라는 전문용어(?)가 튀어나오는 것이 요즘 세상이다.
이 아이야 의사나 상담사에게서 들어서 그렇게 알고 있는 것이겠지만, 일반인 사이에서도 아주 흔히 쓰는 말이 되어 버렸다. ‘분노조절 장애’. 정신의학 분야에서 정식으로 쓰이는 명칭은 ‘외상 후 격분 장애(post-traumatic embitterment disorder)’다.
‘정신적 고통이나 충격 이후에 부당함·모멸감·좌절감· 무력감 등이 지속해서 빈번히 나타나는 부적응 반응의 한 형태’로 설명된다.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생각으로 증오와 분노의 감정 상태가 지속하는 장애를 말한다.
분노조절 장애 증상이 발현된 상사뱀
그동안 상사뱀 이야기를 몇 차례 했었는데, 이들이 자신의 사랑이 거부당한 데 좌절해 자신의 존재 자체를 버리고 뱀의 형상을 갖게 되는 서사가 이러한 증상으로 발현된다고 할 수 있다. ‘거부당한’ 혹은 ‘무시당한’ 사건의 주체가 부당하다고 해석하면서 이에 대해 격분하는 것이다. 이러한 격분은 자신의 존재 자체까지 변형시킬 만큼 위력을 갖는다.
살인사건이 일어났을 때 범행 현장에서 살인의 의도를 파악하는 주요 단서 중 하나가 상해를 입힌 정도일 것이다. 최근에 일어난 살인 사건에서도 얼굴에 72차례나 공격당했다는 흔적이 있다는 것 때문에 대중의 격분이 이어지기도 했다.
‘참을 인 세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는 속담이 생겨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배경이 된다. 옛날에 어느 농부가 장가를 갔는데, 부인은 공부를 좀 했고 이 남자는 아주 무식했다.
부인은 남편에게, “여보, 인위지덕(忍爲之德)이면 잘 살 수 있다는데 무슨 일이 생겨도 그저 참으시오. 열 가지고 백 가지고 참으면 다 잘 살 수 있답니다” 하고 늘 가르쳤다. 남편은 산에 일하러 다니면서도 부인이 인위지덕이면 잘 살 수 있다고 한 말을 떠올리면서 항상 “인위지덕, 인위지덕” 하며 다녔다.
하루는 궂은 비가 오면서 산에 안개가 가득 끼어 더는 일을 할 수 없게 됐다. 그동안 나무한 것을 짊어지고 평소보다 좀 이른 시간에 집에 돌아왔는데, 마당에 나뭇짐을 벗어 놓고 방에 들어가려다 보니 남자 짚신이 한 켤레 딱 놓여 있었다. 그래서 문구멍으로 방 안을 들여다보니 머리를 홀딱 깎은 사람이 하나 부인과 나란히 누워서 자는 것이었다.
남편은 화가 잔뜩 나서 이놈을 도끼로 때려잡는다며 문고리를 쥐고 막 잡아당기려다가 ‘인위지덕’이라는 말이 떠올라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섰다. 그래도 분이 나서 다시 문고리를 잡고 들어가려다 또 물러섰다 그러길 세 번을 하고는 일단 ‘인위지덕’을 마음에 새기고는 짐짓 큰기침하면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방 안에서 잠자던 부인과 함께 있던 사람이 기침 소리에 눈 비비며 일어나는데, 머리 깎은 사람은 여자 중이었다.
부인이 밭에서 일하다가 산에서 내려온 이 중을 만났다는 것이다. 마침 비가 내리고 하니 집에 가 점심이나 먹고 가라고 하면서 중과 함께 집에 왔다고 했다. 그러고는 잠시 낮잠을 잤던 모양인데, 그 사이 남편이 돌아와 그 모습을 보고는 부인이 웬 놈이랑 대낮부터 동침하는 줄 알고 큰일을 낼 뻔했다.
부인과 남편의 이야기를 다 들은 중은 “오늘 내가 죽을 뻔했는데 인위지덕 때문에 살았으니까 내가 내 재산을 반을 나눠 주겠다”고 말했다. '참을 인' 자를 떠올린 덕에 살인을 면하고 재산도 얻게 된 이야기이다.
공자님 말씀에도 등장한다. “모든 행실의 근본은 참는 것이 으뜸이다(百行之本 忍之爲上).” 제자 자장이 몸을 닦는 말 한마디를 내려달라고 청하자 전한 말이라고 한다.
자장이 무엇 때문에 참아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공자는 “천자가 참으면 나라에 해가 없고(天子忍之國無害), 관리가 참으면 그 지위가 올라가고(官吏忍之進基位), 형제가 참으면 집안이 부귀해지고(兄第忍之家富貴), 부부가 참으면 일생을 해로할 수 있고(夫妻忍之終基世), 친구 간에 참으면 명예를 더럽히지 않고(朋友忍之名不廢), 자신이 참으면 재앙이 없을 것(自身忍之無禍害)”이라고 했다.
위의 이야기에서는 자신이 참아 재앙을 피하게 된 서사를 보여준다. 그런데 이때, 진짜 ‘참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이제는 종영해 볼 수 없는 TV 프로 ‘무한도전’에서 개그맨 박명수 씨가 남긴 어록이 지금도 화자 되고 있다. 그중 유독 눈에 띄는 것이 “참을 인이 세 번이면 호구 된다”였다. 이는 '참을 인'자 셋이면 살인도 피한다’는 속담을 비튼 것이다.
꾹 참다 보면 심각한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상황을 피할 수 있다는 속담이 박명수의 입을 통해서는 요즘 세상에서는 참다 보면 호구 되기에 십상이라는 가치관으로 드러났다. 대중은 그의 캐릭터에 기대어 이 말에 대해 통쾌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기존의 상식적인 생각을 비트는 표현이었기에 한 번쯤 그런 생각을 품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나, 그런데 또 이게 잘못되면 ‘참으면 나만 손해’라는 생각을 심어주게 되어 버린다. 더구나 불황 속에 안 그래도 먹고살기도 힘든데 나만 손해 보며 살 순 없다는 생각, 혹은 ‘나만 아니면 돼’ 하는 가치관이 더더욱 세상을 각박하게 만드는 것 같다.
가면 쓰기란 ‘사회적 기술’ 필요한 사회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혼란스럽다. 그렇다고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다 드러내며 살다가는 이 사회에서 발붙이고 살기가 쉽지 않다. 분노와 격분을 포함해 어떤 감정이든 그냥 표출해 버리는 것은 어른스럽지 못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세상 살아가는 데 필요한 ‘사회적 기술’에는 ‘가면 쓰기’가 요구된다. 포커페이스, 혹은 페르소나. 적당히 가리고 꾸며서 적당히 섞여들고 적당히 호감을 얻어 내야 사람 좋고 믿을 만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참을 인이 세 번이면 호구 되는 세상,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 호구 되기를 자처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직장 상사 혹은 회장님이라고 해서 나를 짓밟고 사람들 다 보는 데서 마구 걷어차고 주먹질을 해대는데도 참아 왔다. 술만 마시면, 혹은 끊임없이 의심을 해대며 죽을 만큼 폭행을 일삼는 남편을 참으며 살아왔다. 왜? 무엇을 위해서?
‘참을 인 세 번’이 필요한 상황이 있고 그렇지 않은 상황이 있다. ‘무조건 참아라’도 안 되고, ‘무조건 참지 마라’도 안 된다. 어떤 때 어떤 태도를 갖추어야 할지 사태 파악을 할 수 있는 냉철한 눈이 필요할 때가 아닐까.
권도영 건국대학교 서사와문학치료연구소 초빙교수 irhett@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