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 권도영의 구비구비 옛이야기(21)
이 그림의 숨은 사연은 이렇다. 역모죄로 몰려 굶겨 죽이는 형벌에 처한 아버지를 만나러 간 딸이 몰래 젖을 먹여 아버지를 연명시켰고, 그 사연을 들은 왕은 딸의 효심에 감복해 아버지를 풀어주었다는 것이다.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는 가장 고귀한 사례로 여겨지는 이 그림의 주제에 대해 사람들은 ‘카리타스 로마나(Caritas Romana)’, 즉 ‘로마인의 자비’라고 말하고 있다.
어사에 젖을 물린 작은 며느리 칭찬하는 시아버지
옛날 유 씨네 집안이 참 가난했다. 어느 날 이 집 며느리 둘이 나물을 뜯으러 산에 갔다 오다가 산길에 웬 거지 하나가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 작은 며느리가 들여다보니 아무래도 허기에 지친 것 같아 젖을 먹였다.
작은 며느리는 아이를 낳은 지 얼마 안 됐는데, 온종일 산에서 나물을 뜯다 보니 안 그래도 젖이 불어 있었다. 작은 며느리가 거지에게 그렇게 젖을 먹이는 것을 보고 큰며느리는 작은 며느리에게 미쳤다고 욕을 하면서 나물 바구니를 들고 먼저 가 버렸다. 작은 며느리는 한참 젖을 물리고 나서 거지가 정신을 차리는 것을 보고는 마을로 내려왔다.
집에 먼저 들어간 큰 며느리는 시아버지에게 작은 며느리가 거지에게 젖을 물린 일을 일러바치면서 어린아이는 안 먹이고 웬 거지한테 젖을 물리고 있다며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했다. 그런데 유 씨는 “아가, 그런 소리 하지 마라. 사람이 허기를 만나 죽을 지경이 되었으면 사람을 살려야 하는 것 아니겠냐” 며 오히려 큰며느리를 나무랐다. 그러고는 곧이어 들어온 작은 며느리에게는 “죽어가는 사람을 살렸으니, 오늘 참 좋은 일을 했다” 고 칭찬을 했다.
그날 저녁 그 거지가 유 씨 집을 찾아와서는 작은 며느리 덕분에 살아날 수 있었다며 사실은 자신이 암행어사라고 했다. 그리고 내일 어사 출두를 하면서 이 집에 사람을 보낼 테니 첫 번째와 두 번째 사람한테는 어딜 오라 가라 하느냐고 호통을 쳐 그냥 돌려보내라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세 번째에는 고을 원을 보낼 테니 그때에는 못 이기는 척하고 따라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암행어사는 다음날 어사 출두를 한 후 “이 고을에 하회 유씨 양반이 계시는가” 하고 물은 뒤 그 양반을 좀 뵈어야겠다고 청했다. 유씨가 어제 약속한 대로 세 번째 찾아온 고을 원을 따라갔더니 어사가 버선발로 마당에 뛰어나가 코가 땅에 닿도록 절을 했다. 온 고을 사람들이 그때부터는 유씨 집안을 우러러보게 되었고, 이 집안은 그 이후 영남에서 제일 잘 나가는 집안이 됐다.
천하의 암행어사도 워낙 이 고을, 저 고을 다니다 보면 허기에 지쳐 길바닥에서 쓰러지기도 했던 모양이다. 본래 어사 정도 되는 이가 보은을 할 때는 이런 식이다. 자신을 도와준 집안이 어사와 친분이 있음을 만천하에 알려 그 집안의 기세를 살려주는 것이다.
유 씨는 집안이 몰락해 내세울 것도 없는 처지였으나, 생판 모르지만 죽어가는 사람에게 젖을 먹여 살려냈다며 오히려 칭찬했다. 양반의 도리나 남녀유별의 법도는 목숨 앞에서 무시당해도 좋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 마음을 자비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어사는 유 씨와 며느리의 자비심에 감복하여 보은한 것이다.
여성의 가슴에 대한 두 가지 시선
개인적으로 참 싫어하는 속어 중 하나가 ‘슴가’다. 주로 인터넷상에서 남성이 여성의 유방을 칭하는 말인데, 굳이 이렇게밖에 칭하지 못하는 저속함이 안타깝다. 가슴을 가슴이라 부르지 못하고, 유방을 유방이라 부르지 못하는 치졸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가슴’이 특정 인터넷 사이트에서 검색 금지어가 되면서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가슴이 그렇게도 자주, 그리고 깔끔하지 못한 의도에 의해 검색되었음을 반증하는 현상이기도 하겠다.
전통적으로 여성의 가슴은 생산성의 상징이기도 했고, 찬양할 미적 대상이기도 했다. 아르테미스의 조각상은 생산성으로 본 가슴일 테고, 르누아르의 ‘잠든 나부’와 같은 작품이 그려내는 모습은 아름다운 대상으로서 본 가슴일 것이다. 어느 쪽이 되었든 여성의 가슴은 남성에 의해 대상화한 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며, 숭배나 찬양 혹은 남성의 영원한 모성회귀본능을 자극하는 아이콘이기도 하다.
여자의 가슴을 숭배하는 일은 태초부터 이어져 온 관습이지만 이는 오로지 여자의 생산성만을 염두에 둔 것이었으며, 남성은 가지지 못한 신체 기관에 대한 숭배 혹은 찬양은 역으로 여성의 몸을 억압하는 기제가 되었다. 그러나 더는 아이를 낳는 일이 노동력의 생산으로만 여겨지지는 않는, 혹은 그래서는 안 되는 세상이 돼 버렸다.
남녀 윤리 초월하는 생명 존중 정신
이야기 속의 어사는 개별 주체들의 행동에 대해 사회적 판단과 평가를 해주는 역할을 한다. 즉 어사가 인정했다는 것은 사회적으로도 용인되거나 혹은 추앙되어야 할 행동으로 자격을 얻었다는 뜻이 된다. 여자가 자신의 몸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엄격한 규율은 생명을 살리는 일 앞에서 현실 논리로 거부된다. 상생을 위해서는 제도를 위해 규율된 윤리를 초월해 생명에 집중하는 일이 필요하다.
권도영 건국대학교 서사와문학치료연구소 초빙교수 irhett@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