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9.01.24 유현준 홍익대 교수·건축가)
SNS 이후 '끼리끼리 소통'하는 집단이기주의 커진 것처럼
아파트도 외부 출입 통제하는 폐쇄적 단지들이 속속 등장
발전 이끄는 건 폐쇄보다 개방 '나보다 우리' 배려하는 住居 필요
유현준 홍익대 교수·건축가
'플래시 몹(flash mob)'이라고 있었다.
사람들이 한 시간에 한 장소에 모여서 춤을 추고 금방 흩어지는 놀이였다.
IT의 발달로 생겨난 새로운 사회현상이었다. 그때는 참 재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플레시 몹' 놀이를 가능케 했던 IT가 지금은 사회를 파괴하기도 한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인 토머스 프리드먼은 현대사회에서 소셜미디어(SNS) 기술은 소수의 의견을 증폭하고 사람을
선동하기 쉬워서 기존 체제를 전복시키기에 아주 효과적이라고 평가한다.
그는 SNS는 '끼리끼리의 소통'만 증가시키고 집단끼리의 갈등은 증폭시켜서 사회를 융합하는 데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확한 지적이다. 현대사회는 SNS 때문에 집단 이기주의가 증폭되고 있다.
과거에는 일부 특정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고 다수의 피해자가 있었다면, 지금은 이익 집단을 규합하고 의견을 증폭시키고
여론을 선동할 수 있는 소셜 미디어 덕분에 과거보다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사람들도 자신의 의견을 집단 '플래시 몹'처럼
표현할 수 있게 됐다.
대자보를 붙이고 화염병을 던지는 대신, 카톡·트위터·페이스북으로 집결을 통보하는 식이다.
이제는 국민적 규모의 움직임이 아닌 일부 집단으로도 과거 전체 국민이 일으킨 혁명 수준의 파급력을 가져올 수 있다.
여기에다 '매크로' 같은 신기술까지 더해지면 그 파급력은 더 증폭된다.
1945년 이후 인류는 전체를 파멸로 이끌 수 있는 원자폭탄을 가졌다면,
21세기에는 SNS라는 기술이 사회를 파멸로 이르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혼란이 가중되고 미래가 불안해질수록 공동의 관심사를 가진 집단들은 위기감을 느끼고 더욱 집결한다.
사회는 여러 이익집단의 다핵화 구조로 분열되고 집단 사이의 충돌이 잦아졌다.
집단으로 모였다고 해서 모두가 항상 선한 것은 아니다. 이 시대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일러스트=이철원
건축에서도 집단 이기주의 공간이 생겨나고 있다. 주거 단지는 점점 폐쇄적으로 바뀌고 있다. 아파트 단지의 담장 구획을
넘어서 이제는 주택도 개별 필지보다는 수십 채의 주택이 단지로 형성되어 출입 통제 정문이 있는 단지로 변화하고 있다.
고급 빌라의 경우에는 차고(車庫)에 게이트 바(gate bar) 정도가 아니라 셔터 설치가 필수적이 되고 있다. 과거 1970년대에는
주택의 담장에 깨진 유리병을 설치했던 시절이 있었다. 치안이 불안하던 시절에 개인적으로 보안 시설을 만든 것이다.
1980~1990년대를 거치면서 경제 발전이 이루어지고 치안이 강화되면서 이런 모습은 사라졌다. 1980년대 지어진 아파트들은
개방적인 모습을 띤다. 그러다가 1990년대 타워팰리스를 기점으로 폐쇄적인 단지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최근 재개발된
아파트 단지를 통과하는 외부 차량은 있을 수가 없다.
집단 이기주의는 인류의 본능이다. 그 덕분에 사피엔스는 더 큰 조직을 만들고 네안데르탈인을 이겼다.
부족 단위가 가장 큰 집단 크기라고 상상했던 무리는 국가 규모를 꿈꾸는 집단에게 무너졌다.
더 큰 조직의 무리를 상상(想像)하는 자들은 항상 그보다 작은 규모를 꿈꾸는 자를 이겨왔다.
반대로 작은 집단 이기주의에 빠진 자는 시대의 흐름에서 항상 뒤처졌다.
주택 담장에 깨진 유리를 없앴을 때 사회가 발전했듯이, 이 시대에 우리 사회가 더 발전을 하려면 내 단지의 울타리라는
집단 이기주의를 깨뜨려야 한다. 고슴도치의 가시가 길어지면 추운 겨울에 서로만 더 찌를 뿐이다.
내가 속한 집단이 고슴도치가 되어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
우리 아파트 단지부터 개방성을 키워보자. 좋은 건축이란 화목하게 하는 건축이다.
그러기 위해서 아파트 단지를 설계할 때 단지 주민들끼리만 화목할 것이 아니라, 단지 주민과 인도 위의 시민과의 사이도
화목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파트 담장을 부수고 그 자리에 벤치를 놓으면 어떨까.
길을 걷던 사람들이 쉬면서 아파트 단지의 정원을 즐길 수 있게 말이다.
그렇게 되면 나 역시 다른 동네에 가서 남의 아파트 정원을 즐길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이제 좀 더 큰 그림을 봐야 한다.
내 아파트 단지, 내 노조, 내 정치 계파라는 작은 단체의 그림에서 우리 도시, 우리나라 전체, 전(全) 인류라는 더 큰 집단을
상상해야 한다. 인류 역사를 보면 항상 더 큰 집단을 상상하는 조직이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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