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선데이]
2019.01.19 00:02
“검은색이고 우중충한 스타일”
잡스, 1983년 강연서 소니 혹평
스카우트한 소니 개발자에게
바우하우스 디자인 베끼게 해
‘깔끔한 백색’ 애플 신화 완성
대학 입학 후 우연히 손에 넣게 된 소니 워크맨의 그 깜찍함은 내게 충격이었다. 레너드 코언이 노래하는 거친 저음의 ‘소 롱 매리앤느(So Long, Marianne)’를 들었다. 전율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이미 했던 이야기 ‘하고, 또 하는’ 사내들의 술자리를 극도로 혐오한다. 차라리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듣는 편이 훨씬 행복하다. 소니 워크맨의 충격 이후 생긴 습관이다.
한동안 나는 소니의 전자제품을 사고 싶어 환장했다. 전자제품이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싶었다. 유학 시절에는 소니의 트리니트론(Trinitron) TV가 그렇게 갖고 싶었다. 그러나 가격이 삼성·LG TV의 두 배였다. 3평 남짓한 기숙사에 사는 유학생이 소유하기엔 너무 크고 사치스러운 물건이었다.
그렇게 아름다웠던 소니의 물건들이 어느 순간부터 황당하게 변했다. 오늘날의 소니는 그때 나를 그렇게 흥분시켰던 그 소니가 더 이상은 아니다. 회생 불가능해 보인다.
그때, 마음을 빼앗았던 소니의 디자인
당시 소니는 어떻게 그토록 폼이 났을까. 소니의 전성기는 1975년 독일의 전자회사 베가(Wega)를 인수한 후부터다. 23년 설립된 베가는 역시 독일의 전자회사인 브라운(Braun)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쟁하며 둘 다 전자기기에 ‘디자인’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연결시킨, 독일을 대표하는 기업이었다. 당시 브라운에는 한스 구겔로트(Hans Gugelot·1920~65)와 디터 람스(Dieter Rams·1932~)라는 전설적인 디자이너가 있었다. 브라운에 뒤처져 있던 베가는 외부의 디자인 회사에 제품 디자인을 맡겼다.
승부수는 먹혔다. 베가의 제품들은 단숨에 브라운을 따라잡았다. 이때 베가의 디자인을 도맡았던 이가 젊고 야심찬 하르트무트 에슬링거(Hartmut Esslinger·1944~)였다. 베가를 인수한 후 베가의 디자인 명성까지도 갖고 싶어 했던 소니는 ‘소니-베가(Sony-Wega)’라는 브랜드를 새로 만들었다. 베가의 디자인을 도맡았던 에슬링거와의 공동작업도 한동안 계속됐다(‘소니-베가’는 2005년 ‘브라비아(Bravia)’라는 새로운 브랜드가 생길 때까지 지속됐다). 유학시절 그렇게 갖고 싶었던 소니의 트리니트론 TV는 바로 소니-베가의 에슬링거가 디자인한 제품이었다.
소니의 전자제품에 대한 내 관심이 식어갈 무렵 새 전자제품이 나타나 다시 내 영혼을 빼앗았다. 애플이다. 나는 애플의 새 제품을 사고 싶어 안달했다. 애플 컴퓨터는 윈도 기반의 컴퓨터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비쌌다. 그래도 나는 애플이 갖고 싶었다. 너무 예뻤기 때문이다. 당시 나를 환장하게 했던 애플 컴퓨터의 디자인은 ‘백설공주(Snow White)’ 디자인이라 불렸다. 이것이 소니 트리니트론을 디자인했던 하르트무트 에슬링거, 바로 그의 작품이었다는 것을 한참 후에 알았다. 그는 82년부터 애플에 합류했다.
스티브 잡스도 한때 ‘소니 마니아’였다. 잡스가 집의 차고를 나와 처음으로 얻은 사무실은 소니 매장과 같은 건물이었다. 잡스는 수시로 소니 매장을 기웃거렸다. 그때 자신에게 새로운 제품이 나올 때마다 브로슈어를 건네준 판매원을 잡스는 훗날 애플로 스카우트했다. 바로 그 ‘소니 스타일’을 개발한 에슬링거가 이제 애플의 스티브 잡스와 손잡은 것이다. 그러나 새로 영입한 에슬링거에게 잡스가 요구한 것은 정작 ‘소니 스타일’이 아니었다. ‘바우하우스 스타일’이었다.
소니에서 바우하우스로
김정운의 ‘바우하우스 이야기’<2>
“검은색이고 우중충한 스타일”
잡스, 1983년 강연서 소니 혹평
스카우트한 소니 개발자에게
바우하우스 디자인 베끼게 해
‘깔끔한 백색’ 애플 신화 완성
대학 입학 후 우연히 손에 넣게 된 소니 워크맨의 그 깜찍함은 내게 충격이었다. 레너드 코언이 노래하는 거친 저음의 ‘소 롱 매리앤느(So Long, Marianne)’를 들었다. 전율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이미 했던 이야기 ‘하고, 또 하는’ 사내들의 술자리를 극도로 혐오한다. 차라리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듣는 편이 훨씬 행복하다. 소니 워크맨의 충격 이후 생긴 습관이다.
한동안 나는 소니의 전자제품을 사고 싶어 환장했다. 전자제품이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싶었다. 유학 시절에는 소니의 트리니트론(Trinitron) TV가 그렇게 갖고 싶었다. 그러나 가격이 삼성·LG TV의 두 배였다. 3평 남짓한 기숙사에 사는 유학생이 소유하기엔 너무 크고 사치스러운 물건이었다.
그렇게 아름다웠던 소니의 물건들이 어느 순간부터 황당하게 변했다. 오늘날의 소니는 그때 나를 그렇게 흥분시켰던 그 소니가 더 이상은 아니다. 회생 불가능해 보인다.
그때, 마음을 빼앗았던 소니의 디자인
당시 소니는 어떻게 그토록 폼이 났을까. 소니의 전성기는 1975년 독일의 전자회사 베가(Wega)를 인수한 후부터다. 23년 설립된 베가는 역시 독일의 전자회사인 브라운(Braun)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쟁하며 둘 다 전자기기에 ‘디자인’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연결시킨, 독일을 대표하는 기업이었다. 당시 브라운에는 한스 구겔로트(Hans Gugelot·1920~65)와 디터 람스(Dieter Rams·1932~)라는 전설적인 디자이너가 있었다. 브라운에 뒤처져 있던 베가는 외부의 디자인 회사에 제품 디자인을 맡겼다.
승부수는 먹혔다. 베가의 제품들은 단숨에 브라운을 따라잡았다. 이때 베가의 디자인을 도맡았던 이가 젊고 야심찬 하르트무트 에슬링거(Hartmut Esslinger·1944~)였다. 베가를 인수한 후 베가의 디자인 명성까지도 갖고 싶어 했던 소니는 ‘소니-베가(Sony-Wega)’라는 브랜드를 새로 만들었다. 베가의 디자인을 도맡았던 에슬링거와의 공동작업도 한동안 계속됐다(‘소니-베가’는 2005년 ‘브라비아(Bravia)’라는 새로운 브랜드가 생길 때까지 지속됐다). 유학시절 그렇게 갖고 싶었던 소니의 트리니트론 TV는 바로 소니-베가의 에슬링거가 디자인한 제품이었다.
소니의 전자제품에 대한 내 관심이 식어갈 무렵 새 전자제품이 나타나 다시 내 영혼을 빼앗았다. 애플이다. 나는 애플의 새 제품을 사고 싶어 안달했다. 애플 컴퓨터는 윈도 기반의 컴퓨터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비쌌다. 그래도 나는 애플이 갖고 싶었다. 너무 예뻤기 때문이다. 당시 나를 환장하게 했던 애플 컴퓨터의 디자인은 ‘백설공주(Snow White)’ 디자인이라 불렸다. 이것이 소니 트리니트론을 디자인했던 하르트무트 에슬링거, 바로 그의 작품이었다는 것을 한참 후에 알았다. 그는 82년부터 애플에 합류했다.
스티브 잡스도 한때 ‘소니 마니아’였다. 잡스가 집의 차고를 나와 처음으로 얻은 사무실은 소니 매장과 같은 건물이었다. 잡스는 수시로 소니 매장을 기웃거렸다. 그때 자신에게 새로운 제품이 나올 때마다 브로슈어를 건네준 판매원을 잡스는 훗날 애플로 스카우트했다. 바로 그 ‘소니 스타일’을 개발한 에슬링거가 이제 애플의 스티브 잡스와 손잡은 것이다. 그러나 새로 영입한 에슬링거에게 잡스가 요구한 것은 정작 ‘소니 스타일’이 아니었다. ‘바우하우스 스타일’이었다.
소니에서 바우하우스로
잡스는 83년 콜로라도 ‘애스펀(Aspen) 디자인 콘퍼런스’에서 행한 강연에서 그때까지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던 소니를 “검은색이고 우중충하다”며 아주 심하게 ‘디스’했다. 그리고 제품의 기능에 충실한 바우하우스 스타일로 바꾸겠다고 선언한다.
“현재 산업디자인의 흐름은 소니의 하이테크 스타일입니다. 주로 암회색이고, 가끔 검은색을 사용해 이상한 짓을 하기도 하지요. 그렇게 하는 건 쉽습니다. 하지만 위대하진 않습니다…우리가 하려는 것은 하이테크 제품을 만들어 깔끔한 패키지에 담아 소비자들이 패키지만 보고도 하이테크 제품인 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백색 제품을 만들어 작고 깔끔한 패키지에 담을 것입니다. 브라운사의 전자기기에서 느낄 수 있는 느낌을 제공하고자 하는 겁니다.” (월터 아이작슨, 안진환 역, 『스티브 잡스』, 민음사, 2011년, 246~247쪽)
잡스가 바우하우스의 디자인을 접한 것은 ‘애스펀 디자인 콘퍼런스’가 열렸던 바로 그곳이었다. 애스펀 리조트를 총괄 디자인한 이는 헤르베르트 바이에르(Herbert Bayer·1900~1985)다. 그는 애스펀 리조트 전체 조형을 위한 토목작업과 건물설계는 물론 식당·호텔방의 구석구석, 작은 소품에 이르기까지 직접 관여했다.
바이에르는 독일 바우하우스 철학을 그 누구보다도 완성된 형태로 체험한 사람이었다. 그는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에서 21년부터 25년까지 학생으로 공부했다. 바우하우스가 데사우로 이사한 후부터는 인쇄공방의 선생으로 일했다. 오늘날 바우하우스식 타이포그래피로 여겨지는 소문자의 산세리프 글자체가 바이에르의 작품이다. 그는 이 글자체를 ‘유니버설 타입’이라 불렀다. 그는 오늘날 우리가 ‘그래픽 디자인’이라고 부르는 영역의 창시자로 여겨진다(잡스는 자신이 중퇴한 리드대학교에서 배운 것이라고는 ‘타이포그래피’ 수업뿐이었다고 수시로 이야기했다. 그때 잡스가 인상적으로 느꼈던 산세리프체를 대중화시킨 이가 바로 바이에르다).
나치의 억압을 피해 38년 미국 뉴욕으로 이주한 바이에르는 45년 대규모 프로젝트를 제안받는다. 바로 애스펀 리조트의 설계였다. 리조트가 건립되고 수십 년이 지난 후 잡스는 이곳에서 바이에르가 디자인한 ‘바우하우스식 깔끔한 디자인’에 깊은 감명을 받은 것이다.
사실 소니에 대한 잡스의 태도는 사뭇 모순적이다. 83년의 ‘소니 디스’ 발언 이후에도 잡스는 애플의 디자이너들에게 수시로 “만약 소니라면 어떻게 만들까?”라고 물었다. 아이폰의 시제품을 만들 때에는 이름을 ‘소니 스타일’이라고 붙여가면서까지 소니를 흉내 내려 했다. ‘소니 디스 사건’이 20년도 더 지난 2006년의 일이다. 잡스의 ‘재팬 스타일’에 대한 관심은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블랙 터틀넥’ 또한 일본 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케의 작품이다.
아무튼 ‘소니에서 바우하우스로(from Sony to Bauhaus)’라는 잡스의 83년 선언은 이제 막 애플에 합류한 에슬링거에게 큰 과제가 됐다. 잡스는 피카소가 남긴 “유능한 예술가는 모방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Good artists copy, great artists steal)”는 이야기를 수시로 했다. 에슬링거는 잡스가 원했던 바로 그 ‘위대한 예술가’였다. 잘 ‘훔쳐왔다’는 이야기다. ‘소니 스타일’에서 벗어나 ‘바우하우스 스타일’로 옮겨가 달라는 잡스의 요청을 받은 에슬링거는 독일 브라운사의 디터 람스에게서 ‘훔쳐왔다’.
잡스 손잡은 에슬링거 ‘디터 람스’를 훔치다
훔쳐온 제품 디자인의 명칭도 하필 ‘백설공주’였다. 디터 람스가 디자인한 제품 중 가장 히트 친 복합음향기기 SK 시리즈의 별명이 바로 ‘백설공주의 관(棺)’이었기 때문이다. 턴테이블과 진공관 라디오를 일체형으로 개발한 브라운의 SK 시리즈는 독일 특유의 둔탁한 느낌은 찾아볼 수 없는 전혀 다른 모습의 전자기기였다. 전체적으로 하얗고, 아크릴로 된 뚜껑으로 내부가 들여다보이기에 이런 별명을 얻었다. 거기에 스피커를 장식한 가늘고 긴 세로의 선들은 기계를 더욱 깔끔하고 날렵하게 보이게 해주었다. 에슬링거의 애플 컴퓨터는 디터 람스의 이 같은 디자인적 특징을 그대로 훔쳐온 것이다.
디터 람스는 바우하우스의 전통을 다시 세우기 위해 전쟁 후 서독에 설립된 ‘울름조형학교(Hochschule für Gestaltung Ulm)’와 아주 깊은 관련이 있다. 에슬링거의 뒤를 이어 오늘날까지 애플의 디자인을 책임지고 있는 조너선 아이브(Jonathan Ive) 또한 디터 람스의 디자인을 ‘훔쳐왔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20세기 후반 가장 혁신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소니와 애플의 디자인은 이런 식으로 1919년 설립된 바우하우스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바우하우스는 도대체 어떤 학교였던 걸까.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베를린자유대학교에서 문화심리학으로 디플롬,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베를린자유대 전임강사, 명지대 교수를 역임했다. 2012년, 교수를 사임하고 일본 교토 사가예술대에서 일본화를 전공했다. 2016년 귀국 후, 여수에 살며 그림 그리고, 글 쓰고, 작은 배를 타고나가 눈먼 고기도 잡는다. 저서로『에디톨로지』『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남자의 물건』등이 있다.
“현재 산업디자인의 흐름은 소니의 하이테크 스타일입니다. 주로 암회색이고, 가끔 검은색을 사용해 이상한 짓을 하기도 하지요. 그렇게 하는 건 쉽습니다. 하지만 위대하진 않습니다…우리가 하려는 것은 하이테크 제품을 만들어 깔끔한 패키지에 담아 소비자들이 패키지만 보고도 하이테크 제품인 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백색 제품을 만들어 작고 깔끔한 패키지에 담을 것입니다. 브라운사의 전자기기에서 느낄 수 있는 느낌을 제공하고자 하는 겁니다.” (월터 아이작슨, 안진환 역, 『스티브 잡스』, 민음사, 2011년, 246~247쪽)
잡스가 바우하우스의 디자인을 접한 것은 ‘애스펀 디자인 콘퍼런스’가 열렸던 바로 그곳이었다. 애스펀 리조트를 총괄 디자인한 이는 헤르베르트 바이에르(Herbert Bayer·1900~1985)다. 그는 애스펀 리조트 전체 조형을 위한 토목작업과 건물설계는 물론 식당·호텔방의 구석구석, 작은 소품에 이르기까지 직접 관여했다.
바이에르는 독일 바우하우스 철학을 그 누구보다도 완성된 형태로 체험한 사람이었다. 그는 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에서 21년부터 25년까지 학생으로 공부했다. 바우하우스가 데사우로 이사한 후부터는 인쇄공방의 선생으로 일했다. 오늘날 바우하우스식 타이포그래피로 여겨지는 소문자의 산세리프 글자체가 바이에르의 작품이다. 그는 이 글자체를 ‘유니버설 타입’이라 불렀다. 그는 오늘날 우리가 ‘그래픽 디자인’이라고 부르는 영역의 창시자로 여겨진다(잡스는 자신이 중퇴한 리드대학교에서 배운 것이라고는 ‘타이포그래피’ 수업뿐이었다고 수시로 이야기했다. 그때 잡스가 인상적으로 느꼈던 산세리프체를 대중화시킨 이가 바로 바이에르다).
나치의 억압을 피해 38년 미국 뉴욕으로 이주한 바이에르는 45년 대규모 프로젝트를 제안받는다. 바로 애스펀 리조트의 설계였다. 리조트가 건립되고 수십 년이 지난 후 잡스는 이곳에서 바이에르가 디자인한 ‘바우하우스식 깔끔한 디자인’에 깊은 감명을 받은 것이다.
사실 소니에 대한 잡스의 태도는 사뭇 모순적이다. 83년의 ‘소니 디스’ 발언 이후에도 잡스는 애플의 디자이너들에게 수시로 “만약 소니라면 어떻게 만들까?”라고 물었다. 아이폰의 시제품을 만들 때에는 이름을 ‘소니 스타일’이라고 붙여가면서까지 소니를 흉내 내려 했다. ‘소니 디스 사건’이 20년도 더 지난 2006년의 일이다. 잡스의 ‘재팬 스타일’에 대한 관심은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블랙 터틀넥’ 또한 일본 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케의 작품이다.
아무튼 ‘소니에서 바우하우스로(from Sony to Bauhaus)’라는 잡스의 83년 선언은 이제 막 애플에 합류한 에슬링거에게 큰 과제가 됐다. 잡스는 피카소가 남긴 “유능한 예술가는 모방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Good artists copy, great artists steal)”는 이야기를 수시로 했다. 에슬링거는 잡스가 원했던 바로 그 ‘위대한 예술가’였다. 잘 ‘훔쳐왔다’는 이야기다. ‘소니 스타일’에서 벗어나 ‘바우하우스 스타일’로 옮겨가 달라는 잡스의 요청을 받은 에슬링거는 독일 브라운사의 디터 람스에게서 ‘훔쳐왔다’.
잡스 손잡은 에슬링거 ‘디터 람스’를 훔치다
훔쳐온 제품 디자인의 명칭도 하필 ‘백설공주’였다. 디터 람스가 디자인한 제품 중 가장 히트 친 복합음향기기 SK 시리즈의 별명이 바로 ‘백설공주의 관(棺)’이었기 때문이다. 턴테이블과 진공관 라디오를 일체형으로 개발한 브라운의 SK 시리즈는 독일 특유의 둔탁한 느낌은 찾아볼 수 없는 전혀 다른 모습의 전자기기였다. 전체적으로 하얗고, 아크릴로 된 뚜껑으로 내부가 들여다보이기에 이런 별명을 얻었다. 거기에 스피커를 장식한 가늘고 긴 세로의 선들은 기계를 더욱 깔끔하고 날렵하게 보이게 해주었다. 에슬링거의 애플 컴퓨터는 디터 람스의 이 같은 디자인적 특징을 그대로 훔쳐온 것이다.
디터 람스는 바우하우스의 전통을 다시 세우기 위해 전쟁 후 서독에 설립된 ‘울름조형학교(Hochschule für Gestaltung Ulm)’와 아주 깊은 관련이 있다. 에슬링거의 뒤를 이어 오늘날까지 애플의 디자인을 책임지고 있는 조너선 아이브(Jonathan Ive) 또한 디터 람스의 디자인을 ‘훔쳐왔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20세기 후반 가장 혁신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소니와 애플의 디자인은 이런 식으로 1919년 설립된 바우하우스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바우하우스는 도대체 어떤 학교였던 걸까.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베를린자유대학교에서 문화심리학으로 디플롬,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베를린자유대 전임강사, 명지대 교수를 역임했다. 2012년, 교수를 사임하고 일본 교토 사가예술대에서 일본화를 전공했다. 2016년 귀국 후, 여수에 살며 그림 그리고, 글 쓰고, 작은 배를 타고나가 눈먼 고기도 잡는다. 저서로『에디톨로지』『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남자의 물건』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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