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디자인·건축

김정운의 바우하우스 이야기 <4> 상품서 건축까지 폼 나게…디자인은 ‘모두를 위한 예술’

바람아님 2019. 3. 6. 07:39
[중앙선데이] 2019.02.16 00:21

‘예술을 위한 예술’에서 벗어나
일상서 미학적 경험하게 만들어

독일 베렌스, CI·디자인 경영 창시
바우하우스 주역들 그 조수로 활동

공업·산업화 시대 ‘미술공예운동’
아르누보·유겐트슈틸로 이어져


김정운의 바우하우스 이야기 <4> 
독일 다름슈타트 마틸덴호 미술관 에 있는 아르누보풍의 스테인드글라스. 넝쿨 나뭇잎과 꽃 장식은 ‘아르누보’ 혹은 ‘유겐트슈틸’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모두를 위한 예술’을 가능케 하려는 당시 예술가들의 노력이 숨겨져 있다. [사진 윤광준]

독일 다름슈타트 마틸덴호 미술관 에 있는 아르누보풍의 스테인드글라스. 넝쿨 나뭇잎과 꽃 장식은 ‘아르누보’ 혹은 ‘유겐트슈틸’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모두를 위한 예술’을 가능케 하려는 당시 예술가들의 노력이 숨겨져 있다. [사진 윤광준]


20세기 이후의 한반도 근대화는 두 갈래다. 서양을 대리한 일본에 의해 강제로 진행된 근대화, 그리고 해방 이후 미군 부대를 통해 유입된 압축적 근대화다. 비유하자면 ‘나훈아, 이미자식의 근대’와 ‘패티 김, 조영남식의 근대’다.
 
뒤늦게 한반도의 근대화 과정을 새로운 시각으로 정리해보려는 시도들은 ‘분단’이라는 이념적 장애물에 아주 쉽게 걸려든다. 주제와 관계없이 모든 논의를 ‘보수’ 혹은 ‘진보’의 영역으로 환원하려는 암묵적 시도들이다(‘어느 신문’에 연재하는가도 이 ‘황당한 판단’의 치명적 기준이다).
 
그러나 보다 심각한 문제는 우리가 받아들인 서구 근대의 모든 것들이 ‘원래부터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서구에서 유학한 ‘주변부 지식인’이 갖는 근본적 한계이기도 하다.
 
‘원래부터 있었다’고 받아들이는 순간 ‘창조’는 불가능해진다. ‘왜?’ 그리고 ‘어떻게?’ 생겨났는가에 대한 질문이 빠져있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 건 그저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어느 날 하늘에서 툭 떨어진 것은 없다! 죄다 과거 어느 순간에 만들어진 거다! 에디톨로지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세상의 모든 것은 과거 어느 한때의 ‘편집물’이라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들의 편집 과정과 그 맥락을 고려하는 에디톨로지에서 ‘창조’는 그리 놀라운 것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창조의 기회가 주어진다.
 
바우하우스의 혁신에 가장 결정적 영향을 끼쳤던 러시아 구성주의(Constructivism)의 핵심 이론 또한 ‘해체를 통한 편집’이었다. 그들은 이 과정을 ‘구성(construction)’이라 불렀다. 러시아 구성주의와 네덜란드의 ‘데 스틸(De Stijl)’ 운동의 ‘신조형주의(Neoplasticism)’가 주창한 ‘구성의 철학’은 바우하우스의 에디톨로지적 실천을 통해 구체적으로 작동할 수 있었다.
 
‘바우하우스’가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느 순간부터 ‘원래부터 있었던 것’으로 받아들여 일상이 되어버린 ‘서구 근대’의 편집과정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도 새로운 편집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이야기다. 일단 ‘바우하우스’에 가장 근접해 있는 연관검색어인 ‘디자인’ 개념부터 살펴보자.
 
오늘날 누구나 ‘디자인’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도대체 언제부터 ‘디자인’인가? 이는 ‘디자인’이란 개념이 도대체 어떻게 ‘편집’되었는가에 대한 ‘구성사적 질문’이다.
 
 
‘원래부터 있었던 것’은 하나도 없다
 
애플의 제품들이 충격적이기까지 했던 것은 디자인의 힘이었다. 보기도 좋았고, 만지면 더 좋았다(성경에 하와가 선악과를 보고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다’고 한다. ‘죽이는 표현’이다. 디자인적 감각은 태초의 인류부터 있었다는 이야기다). 애플의 제품은 뜯고 나면 버리는 제품의 포장까지 디자인적이었다. 제품을 꺼낼 때부터 감동이었다. 애플 제품의 뒷면에는 ‘Designed by Apple in California’라고 새겨져 있다. ‘Made by Apple’이 아니다. 애플에서 디자인이 어떤 가치를 갖는가를 아주 깔끔하게 보여준다.
 
이제 우리는 ‘디자인’을 단지 상품과 관련해서만 이야기하지 않는다. 요즘 ‘공간’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인테리어와 건축에 대한 사회적 담론은 이제 ‘먹방’만큼이나 흥미롭다. 젊은이들은 분위기 좋은 카페나 커피숍을 찾아다닌다. ‘공간 디자인’ 때문이다. ‘폼 나는 공간’에서 ‘폼 나게 있고 싶다’는 거다. 나는 이를 문화심리학적으로 ‘공간 충동’이라 부른다.
 
페터 베렌스(오른쪽)가 디자인한 AEG 로고가 베를린 터빈공장에 새겨져 있다. [사진 윤광준]

페터 베렌스(오른쪽)가 디자인한 AEG 로고가 베를린 터빈공장에 새겨져 있다. [사진 윤광준]

       
수년 전에는 기업 경영과 관련하여 ‘디자인 경영(design management)’이라는 개념이 유행했다. 소비자는 물론 생산자의 ‘미학적 경험’은 기업의 생산성 및 경쟁력과 아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현대 마케팅 이론에서 이야기하는 ‘통합 마케팅 커뮤니케이션(Integrated Marketing Communication)’ 또한 기업 브랜드의 디자인적 가치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러한 디자인 경영은 독일 전자회사 AEG의 디자인 책임자였던 페터 베렌스(Peter Behrens·1868~1940)부터다.
 
베렌스는 기업과 생산품은 통합적인 하나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CI(Corporate Identity)’ 개념의 창시자다. 그는 1907년부터 AEG의 로고는 물론 인테리어, 노동자들의 주거공간설계, 공장 건축까지 책임지고 디자인했다. 획기적인 시도였다.
 
그러나 그의 CI개념이 본격 활용되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1950년대부터다. 미국의 그래픽 디자이너 폴 랜드(Paul Rand·1914~1996)가 1956년 디자인한 IBM의 로고가 대표적이다(폴 랜드는 스티브 잡스가 애플에서 쫓겨난 후 설립한 회사 NEXT의 로고도 디자인했다. 이런 식으로 ‘즈그들끼리’ 다 연결된다).
 
시대를 앞서는 베렌스의 CI가 가능했던 것은 AEG를 세운 유태계 엔지니어 에밀 라테나우(Emil Rathenau·1838~1915)의 혜안 덕분이다. AEG는 그가 미국 발명가 에디슨의 전구 특허권을 사들여 설립한 회사다. 라테나우는 베렌스에게 세계 최초로 ‘디자인 경영’을 맡긴 것이다. 그의 장남인 발터 라테나우(Walther Rathenau·1867~1922)는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아 경영하다가 정치가로 변신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일의 외무장관을 지냈다. 독일 부르주아 사회로의 진입에 성공한 대표적 유태인이었던 그였지만, 1922년 반유태주의자들에 의해 살해되고 만다.
 
 
1907년 AEG, ‘디자인 경영’이 시작되다
 
1908년 페터 베렌스 사무실의 조수들. 맨 오른쪽 도판 들고 있는 이가 그로피우스. 맨 왼쪽은 미스 반 데 로에. 르 꼬르뷔지에도 여기서 잠시 일했다.

1908년 페터 베렌스 사무실의 조수들. 맨 오른쪽 도판 들고 있는 이가 그로피우스. 맨 왼쪽은 미스 반 데 로에. 르 꼬르뷔지에도 여기서 잠시 일했다.

       
베렌스가 특별한 것은 CI 개념 때문만은 아니다. 20세기 최고의 건축가로 알려진 이들이 모두 한때 그의 조수였기 때문이다. 바우하우스의 설립자 발터 그로피우스와 3대 교장을 지낸 미스 반 데 로에(Ludwig Mies van der Rohe·1886~1969)는 젊은 시절 베렌스의 사무실에서 함께 일했다. 미스 반 데 로에는 나치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의 씨그램 빌딩, 시카고의 연방센터 등을 설계해 본격적인 ‘미국식 고층건물시대’를 열었다. 스위스 출신의 건축가 르 꼬르뷔지에(Le Corbusier· 1887~1965) 또한 한때 베렌스 밑에서 일했다. 건축과 디자인과 실내 인테리어 등의 개념적 경계가 분명하지 않았던 창조적 시절의 이야기다. 분야별 경계가 견고하고 ‘밥벌이 영역’이 명확한 지금보다는 미학적 경험의 개념적 편집이 훨씬 용이했었다는 이야기다.
 
베렌스가 AEG 로고를 처음 디자인한 1907년은 디자인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해다. ‘독일공작연맹(Deutscher Werkbund)’이 창립된 해이기 때문이다. 베렌스는 독일공작연맹 창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영국이나 프랑스에 비해 뒤늦게 공업화가 시작되었던 독일이었다. 하지만 1871년 프로이센 주도로 통일된 독일 제국은 강력한 국가주도 정책을 통해 유럽의 다른 나라와는 비교할 수 없이 빠른 속도로 공업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급속한 공업화로 인해 독일 수공업자들의 생존 기반을 위협하는 사태가 곳곳에서 일어났다. 프로이센 정부는 공업화·도시화로 인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도 함께 세워야 했다. 가장 먼저 산업화·공업화가 진행된 영국에서는 기계 생산을 거부하며 중세 수공업으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미술공예운동(Arts and Crafts Movement)’이 있었다. 존 러스킨(John Ruskin·1819~1900)과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1834~1896)가 주도했다.
 
그러나 이들의 ‘미술공예운동’은 공업화·산업화라는 대세를 부정하는 시대착오적 이상으로 인해 어느 순간부터 자기 모순에 빠지게 된다. 수공업 생산품이 기계 생산품보다 훨씬 고가로 팔려나가면서 귀족들만을 위한 사치품이 되어 버린 것이다.
 
예술과 수공예, 그리고 공업 생산품의 관계를 재정립하려는 ‘미술공예운동’의 문제의식은 이후 프랑스의 ‘아르누보(Art Nouveau)’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유겐트슈틸(Jugendstil)’로 이어졌다. ‘새로운 예술’을 뜻하는 ‘아르누보’나 ‘젊은 스타일’을 뜻하는 ‘유겐트슈틸’에서는 섬세하게 표현된 넝쿨 식물의 나뭇잎이나 꽃이 반복적으로 이어지는 장식이 대표적이다.  
 
 이 같은 뜬금 없는 장식의 이면에는 ‘귀족들만을 위한 예술’ 혹은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예술’이 가능하도록 만들겠다는 당시 예술가들의 혁명적 시도가 숨겨져 있다. 대중의 일상에서 아주 구체적인 미학적 경험이 가능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진정한 ‘디자인’의 시작이다. 건축을 포함한 가구에서 벽지·그릇·옷감·책표지 등등에 이르기까지 ‘모두를 위한 예술’을 가능케 하려는 예술가들의 노력은 아르누보풍의 식물과 꽃 장식으로 처음 결실을 맺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술가들의 새로운 시도와 공업화 혹은 산업화라는 낯선 사회변동과의 관계는 생각만큼 매끄럽게 흘러가지 않았다. 상당 기간 아주 혼란스러웠다.
 
김정운 문화심리학자  
  
베를린 자유대학교에서 문화심리학으로 디플롬,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베를린 자유대 전임강사, 명지대 교수를 역임했다. 2012년, 교수를 사임하고 일본 교토 사가예술대에서 일본화를 전공했다. 2016년 귀국 후, 여수에 살며 그림 그리고, 글 쓰고, 작은 배를 타고나가 눈먼 고기도 잡는다. 저서로 『에디톨로지』『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남자의 물건』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