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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김형석의 100세일기] 구십 노인 Y 여사는 광화문에 나가 있었다

바람아님 2019. 11. 1. 08:24
조선일보 2019.10.19 03:00

[아무튼, 주말- 김형석의 100세일기]

지난달 경북 안동에서 '21세기를 위한 인문학적 과제'라는 큰 포럼이 있었다. 나도 연사로 참석했다. 주최 측은 200명 정도가 모일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800여 명이 신청해 장소를 큰 강당으로 옮겼다.

내 강연을 듣는 이들은 강연이 끝난 뒤에 손뼉을 치곤 한다. 비교적 차분한 논리를 안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강연 도중에 "우리는 후진국이 겪는 권력 사회를 벗어나 법치국가로 진출했다. 앞으로는 선한 가치가 보장되는 질서 사회로 올라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만연해 있는 '법에만 걸리지 않으면 괜찮다'는 사고를 극복해야 한다. 서민도 예외일 수 없으나, 지도층 인사들까지 그런 사고방식을 갖는다면 역사를 후퇴시키는 결과가 된다"고 얘기했다. 그런데 조용히 듣고 있던 청중이 갑자기 손뼉을 쳤다. 뜻밖이었다. 강연이 끝나고 동참했던 사람에게 "청중이 왜 그랬을까" 하고 물었다. 청와대가 하는 일에 대한 불만이었을 것이라고 답했다.

구십 노인 Y 여사는 광화문에 나가 있었다
일러스트= 이철원
강원도 양구에 자주 가게 된다. 자연히 춘천에 있는 세종호텔을 이용한다. 저녁 식사를 위해서다. 전화를 걸면 "오후 6시 30분까지 예약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그 시간을 맞출 수 없는 경우가 많다. 할 수 없이 이곳저곳 헤매다가 늦은 시간에 다시 춘천을 떠나곤 한다. 한번은 호텔에 가벼운 불만을 말했다. 그러나 호텔을 자주 이용하는 사람들 의견은 모두 비슷했다. "주 52시간 근로법을 지켜야 하고, 정규직 문제도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이런 사례는 어디서나 발견한다. 영국인들이 공산 사회를 평가하던 말이 생각난다. 그들은 발 크기에 따라 신발을 만들지 않고 구두를 만들어 놓고 '발을 맞추어 가라'고 명령한다는 얘기다. 법이 질서를 따르지 않고 질서를 법에 맞추어 가는 우를 범한다는 뜻이다.

한글날이었다. 외국으로 보낼 책들을 정리하다가 Y 여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책을 받을 사람이 Y 여사의 친척이다. 두 차례 다 통화가 되지 않았다. 후에 Y 여사에게 얘기했더니 '광화문에 나가 있었다'는 것이다. 90대 연세여서 의사인 아드님이 '혼자서는 절대로 가지 말라'고 당부해 교회 친구들과 나서려고 했다가 후배 친지가 간다기에 동행했다는 얘기였다. 개천절에도 태극기 집회에 참가했는데, 조국 사태에 대한 대통령 주변 사람들의 태도를 보고 안 나갈 수가 없었다고 했다.

Y 여사는 박근혜 정권에 실망해 문재인 대통령을 적극 지지해 왔다.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어 줄 것을 기대했고 최소한 박 정권보다는 좋아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오판이었다고 했다. 박 전 대통령은 개인 최순실 때문에 실정했으나, 조국 사태에서 문 대통령은 정권을 통해 정의와 윤리적 질서를 무시한다는 판단이었다. 취임사를 생각할 때마다 국민은 버림받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고 호소했다.

많은 국민의 애국심이 더 이상 광화문으로 쏠리지 않는 정치를 기대해도 좋을지 모르겠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