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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김형석의 100세일기] 안병욱·김태길… 우리는 어떻게 50년 우정을 지켰는가

바람아님 2019. 10. 31. 08:59
조선일보 2019.10.12 03:00

[아무튼, 주말- 김형석의 100세일기]

김형석의 100세일기 일러스트
일러스트= 이철원
지난주에 책 두 권이 배달되었다. 고려대 동문들이 보낸 인촌(仁村)에 관한 책과 세 철학자가 남긴 '인생의 열매들'이었다. 나에게는 두 스승과 두 친구가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도산 안창호와 인촌 김성수 두 분은 내가 직접 가르침을 받은 은인이다. 17세 때 도산의 마지막 설교를 들었고, 27세부터 7년간 중앙고 교사로 지낼 때는 재단 이사장이던 인촌의 정신적 영향을 받으면서 일했다. 왜 그분들을 잊지 못하는가. 그들의 희생적인 애국심에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분의 폭넓은 우정, 사랑이 있는 인간성에 공감했던 것 같다.

우리 사회에서 흥사단만큼 인재들이 모여 민족에 봉사하는 공동체가 없다. 그것은 도산의 인격과 국가와 민족을 위한 흠모심 때문이다. '죽더라도 거짓말은 하지 말자'던 도산의 말씀은 오늘도 절실한 충언이다. 요사이 애국심은 아랑곳없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청와대와 정당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1955년 인촌의 장례식 날 오후였다. 나도 그 행렬을 따라갔다. 운구 행렬이 고려대 교정에서 끝났다. 고려대 교수들이 휴게실에 모여 '선생이 살아 계실 때는 우리가 가장 사랑을 받아 왔는데, 상대적으로 정치성이 짙은 국민장이 되니까 좀 아쉽다'는 얘기를 했다.

고당 조만식 선생의 사모님 얘기도 생각난다. 해방 후 평양에서 남편과 작별하고 그의 유품 머리카락을 안고 서울에 왔을 때 앞날이 막막했다. 그렇다고 어디 가서 호소할 곳도 없었다. 그때 인촌이 사람을 보내와 찾아갔다. 인촌은 "얼마나 힘드시냐"고 사모님을 위로하면서 '필요하면 거처할 집이라도 준비하여 드리고 싶다"고 했다. 도와달라는 소리가 입안까지 차 있었는데, 두고 온 선생(남편) 말씀이 생각나 "괜찮습니다. 여러 분이 도와주고 있어서…"라고 거짓말을 하고 떠나왔다는 얘기였다.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말고 나 대신 고생해 달라"던 고당의 간곡한 유언이 생각났기 때문이라고 했다.

내 친구인 안병욱과 김태길도 그랬다. 우리에게 오늘이 있게 한 배후에는 젊은이들과 나라를 위하는 공통된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마음 때문에 50년간 우정을 갖고 함께 일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두 친구는 도산, 인촌과 같이 인간미가 풍부했다. 직업과 사회적 편견을 벗어나 인간다움을 잃지 않고 살았다.

한번은 서울대에 일이 있어 찾아갔다. 기다리고 있던 김태길 교수가 뜻밖이라는 표정을 꾸미면서 "난 오늘 김 교수는 못 오는 줄 알았어!"라고 했다. "왜?" 했더니 "바람이 몹시 불어서 도중에 날아간 줄 알았지?"라고 해서 모두 웃었다. 그러면서 잡은 손이 유달리 따뜻했다. 그 손이 말하는 것 같았다. '너무 오래 못 만났어…'라고.

안병욱 선생도 친구로서 나에게 유언을 남겼다. "김 선생은 우리들보다 정신력이 강하니까 우리가 못다 한 일들을 마무리 잘해 줄 거야…." 더 이상 건강이 유지되기 어려움을 예감한 듯했다. 안 선생도 그렇게 떠났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