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20.02.01. 03:13
조용필이 1981년 발표한 노래 '일편단심 민들레야'는 한 70대 여성이 쓴 가사에 음표와 박자를 입힌 곡이다. 이 여성은 6·25전쟁 때 남편이 북에 끌려간 뒤 좌판 노점과 행상을 하며 홀로 삼남매를 키웠다. 황혼에 쓴 자서전 제목이 '일편단심 민들레야'였다. "행복했던 장미 인생/ 비바람에 꺾이니/ 나는 한 떨기/ 슬픈 민들레야" 하는 노랫말엔 한 여인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아픔이 배어 있다.
▶엊그제 '미스터 트롯'에서 29세 출연자가 이 노래를 불렀을 때 많은 사람이 울컥했다고 한다. 가족 중에 납북자가 있거나 누가 궂은 일 하며 홀로 생계를 꾸리기 때문이 아니다. 한국인이기에 그렇다. 그런 가사와 가락에 집중하면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전해진다. 그게 바로 정통 트로트의 힘이다. 그 노래들에 지난 100년간 우리 민족이 겪은 온갖 고초와 풍파가 맺혀 있다.
▶TV조선 '내일은 미스터 트롯' 시청률이 25.7%까지 치솟았다. 2011년 종합편성채널 출범 이후 유료 채널 사상 최고치다. 어림잡아 한국인 1000만명이 목요일 밤 이 프로를 보며 울고 웃는다. 출연자 중 가장 어린 두 아이가 특별출연한 같은 채널 '아내의 맛'도 시청률이 치솟아 동 시간대 1위에 올랐다. '미스터 트롯'은 앞으로 시청률 30%는 물론 그 이상도 얼마든지 올라갈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 예상이다.
▶1만5000여 지원자 중 109명만을 뽑아 시작한 이 노래 경연은 아홉 살 꼬마부터 성악가, 케냐인 유학생, 태권도 국가대표까지 상상을 뛰어넘는 사람들을 등장시켰다. 열세 살짜리 가수가 "아야 뛰지 마라/ 배 꺼질라" 하는 노래 '보릿고개'를 부를 때 원곡 가수는 물론 시청자도 눈물 흘렸다. "교회 오빠하고/ 클럽은 왜 왔는데/ 너네 집 불교잖아/ 니가 왜 거기서 나와" 하는 요즘 트로트에 배꼽도 잡았다. 붕어빵 아이돌들이 천편일률 잡담으로 시간 때우는 프로에서 채널을 돌리는 이유다.
▶'미스 트롯' 때와 달리 '미스터 트롯' 출연자들은 일대일 노래 대결을 할 때 자신보다 실력이 나은 상대를 지목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를테면 류지광이 임영웅을 대결 상대로 지목했을 때 제작진도 깜짝 놀랐다. 제작진은 "남자들의 그런 허세랄까 승부수를 던지는 특성 때문에 더 재미있어졌다"며 "어려워도 도전하고 실패했을 때 펑펑 우는 모습에서 시청자들이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 같다"고 했다. 처음 보는 얼굴들이 만들어 가는 인간극장을 보며 한국인들이 이래저래 답답한 가슴을 씻어낸다.
한현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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