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20.05.11 조용헌)
'해마다 피는 꽃은 같지만, 꽃을 바라보는 사람은 다르구나.'
이 구절에서 '사람은 다르구나'가 의미가 깊다. 우선 사람이 늙어 간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몸의 컨디션이 작년 다르고 올해 다르다는 느낌을 받을 때 인간은 서글퍼진다.
그 서글픈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꽃은 왜 작년이나 올해나 그 빛깔과 이파리가 똑같다는
말인가' 하는 탄식이 나오게 되어 있다.
꽃의 아름다움과 육신의 늙어감이 대비된다.
이 대비에서 인간은 종교적 순응의 마음을 터득하는 것 같다.
순응해야지 어쩌겠는가. 춘하추동의 순환과 생로병사의 변화를 어떻게 거역한단 말인가.
운명에 거역하면 질질 끌려가지만 순응하면 업혀간다는 말도 있다.
기왕 갈 바에는 질질 끌려가는 것보다는 업혀서 가는 게 좋다.
순응과 받아들임. 이것이 나이 들어 가는 미덕이고 사람이 익어간다는 징표라고 생각된다.
나는 주름살이 늘어 가는데 꽃 너는 왜 그렇게 해마다 싱싱한 것이냐 하는 물음도 결국 인간의 욕심이다.
대자연의 섭리가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을 가지고 인간의 주관적 관점으로 철리(哲理)를 비틀어 보는 셈이다.
도법자연(道法自然)이다.
5월 5~6일 무렵이 절기상으로 입하(立夏)이다. 여름의 문턱이다. 이때 피기 시작하는 꽃이 있다. 이팝나무이다.
꽃잎의 색깔이 하얗다. 아침에 일어나 전기 포트에 물을 끓여서 붉은색의 차호(茶壺)에다가 찻잎을 넣고
차를 우려 마시면서 '이만하면 내가 잘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나서 원고를 쓴다. 집밥만 먹다가 가끔 근처의 단골 중국집에 간다.
15분 정도를 걸어가는 길인데 엊그제는 도로 주변의 가로수에 온통 흰 꽃이 피었다. 이팝나무에 꽃이 핀 것이다.
흰 꽃은 붉은색이나 노란색 꽃보다 한 차원 더 높은 느낌을 준다.
흰색이 주는 고결함과 정화된 느낌 때문이다. 재작년에도 보고 작년에도 보았지만 스쳐 지나갔다.
올해는 나무 밑에 서서 한참을 쳐다보았다. 마음속이 복잡하고 생각이 많으면 꽃을 봐도 건성이다.
흰 꽃이 마음속에 들어와 자리를 잡는다는 것은 내가 좀 한가해졌다는 뜻이다.
마음에 여백이 있어야 꽃이 들어올 자리가 있다. 좀 더 한가해지면 내가 꽃잎으로 들어갈 수도 있겠다.
아직은 나 자신을 툴툴 털어 버리고 꽃잎 속으로 내가 빨려 들어가 버리는 경지는 못 갔다.
그렇지만 이거라도 어디인가! 이팝나무 흰 꽃은 멀리서 보니 쌀밥이 얹혀 있는 것 같다.
복목(福木)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5/11/202005110002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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