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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소유였던 별장가보니…정원관리비만 年3000만원

바람아님 2014. 3. 19. 13:05

[100년주택을 찾아서]<9>서울 성북구 성북로(성북동) '이종석별장'

 

편집자주|국토교통부가 2015년부터 100년 주택인 '장수명 아파트' 인증제 도입에 나선다. 유럽에선 100년 주택 찾기가 어렵지 않지만 고속성장을 하며 재개발·재건축을 해온 국내에서는 100년 넘은 집을 찾기가 쉽지 않다. 주택이 100년 이상을 버텨내려면 유지·관리비도 만만치 않다. 100년을 버텨온 주택을 찾아 역사와 유지·관리 노하우, 어려움 등을 알아본다.

- 대지 605㎡·건물면적 99㎡… 조선시대 대표 '여름별장'
- 1900년 이종상 건립 추정…2006년 5~6억원 들여 복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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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김유경기자, 그래픽=강기영 디자이너
 서울 전통의 부촌 1번지 성북동. 현재 재벌총수들과 권력층이 모여사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이곳은 1세기 이전인 1890년대부터 왕족과 갑부들의 별장지대였다.

 성북구 성북로 131(성북동 243-4)에 위치한 '이종석별장'이 대표적인 조선시대 별장으로 꼽힌다. 특히 삼양사와 대림산업 창업주의 별장 또는 요양처로 사용돼 1세기 동안 갑부들의 별장으로 사랑을 받은 곳으로 전해진다. 지금은 덕수교회가 인수해 영성수련원으로 사용한다.

 이종석별장은 담장부터 별스럽다. 대부분 주택 담장은 바람을 막기 위해 쌓아올리기 때문에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기 쉽지 않지만 이종석별장은 담장을 회색 전벽돌로 쌓아올리면서 십자(+) 모양으로 바람구멍을 냈다. 이 주택이 여름별장으로 지어졌음을 쉽게 유추할 수 있는 근거다.

 대문 쪽 담장에 바짝 붙어 서면 바람구멍 사이로 행랑채를 엿볼 수 있는데 멀리선 멋스런 영롱담(마치 구슬이 울리는 소리가 날듯한 꽃문양의 담)일 뿐이다. 길가의 지대가 집터보다 낮아서다. 대문 앞 우물 곁 담벽은 얼음조각 모양을 상징하는 빙결모양으로 꾸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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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이종석별장 영롱담 / 사진=김유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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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롱담에 뚫린 바람구멍으로 들여다본 성북동 이종석별장 행랑채 / 사진=김유경기자

 규모는 아담하다. 대지 605㎡에 건물면적이 99㎡. 가옥은 크게 안채와 이에 부속된 행랑채로 구성됐다. 기록에 따르면 안채와 행랑채를 구분하는 담장과 중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3칸인 평면 남향집이다. 동쪽으로는 정원이 잘 가꾸어져 있다.

 덕수교회 관계자는 "봄에 오면 잔디가 파릇파릇 나오고 계절 꽃도 심어 정말 아름답다"며 "정원을 가꾸는데 드는 비용만 연 2000만~3000만원에 달할 정도"라고 말했다. 창틀 청소비용마저 적지 않다. 3년마다 창틀청소를 하는데 드는 비용이 1500만원 정도. 고택을 유지하기 위해 교인들이 이 모든 비용을 감수한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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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이종석별장 장독대 / 사진=김유경기자

 안채 건물 뒤편에는 장독대와 화단을 만들어 내부에서 바라보는 조망도 뛰어나다. 장독대에 있는 항아리에는 모두 교인들이 정성스레 담근 장들로 채워져 있다.

 행랑채 서쪽 바깥마당에는 우물이 있다. 우물 위 기와지붕은 근래 새로 만들었다. 대문부터 중문과 안채 대청 앞까지 바닥에는 네모단 디딤돌을 놓았다. 비가 와도 이 위로 걸어 다닐 수 있게 해놓은 것인데 시각적으로도 아름답다.

 안채 동남쪽 아래 현재 주차장 자리에는 원래 연당과 정자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없다. 가옥 뒤쪽으로는 소나무와 전나무로 숲을 이루는 낮은 언덕이 있다.

 이종석별장 옛주인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이름부터 이종석, 이종상, 이종숙 등 명확지 않았는데 성북구 이종석별장 실측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이종석의 별장으로 확인됐다. 폐쇄 토지대장에 해당 필지의 토지 소유자가 이종석(경성부 장교정 45-1)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현재 각종 안내물도 이종석별장으로 소개한다.

 이종석의 출신은 여전히 논란이 있다. 행정안전부 향토자원 조사를 비롯해 일반적으로 알려진 내용은 조선 말기에 마포강에서 젓갈장사로 부자가 된 이종상(일명 이종석·이종숙)이 1900년쯤 별장을 지었다는 것이다. 일설에는 왕족이 지은 별장을 매입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성북구 이종석별장 실측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이종석은 가문 대대로 부유했다. 1875년(고종 12년) 11월21일 서울에서 태어나 한학을 배웠으며 신동으로 불렸다. 형이 사고로 익사하면서 땅을 그대로 상속받았는데 9900석을 추수하는 갑부였다고 한다.

 '이종석별장'은 '소설가 이재준가'로도 알려져 있는데 이는 인근 소설가 이태준가와 헷갈렸기 때문으로 확인됐다. 이재준가로 알려진 것은 덕성교회가 인수하기 전 대림산업 창업주 이재준 회장의 소유였기 때문이다.

 이종석별장은 1977년 3월17일 서울시 민속자료로 지정됐다. 당시 소유자인 이재준 회장의 이름을 따서 '성북동 이재준가'로 정해졌다. 문화재 지정 명칭이 '이종석별장'으로 바뀐 것은 2009년 2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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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이종석별장 행랑채 / 사진=김유경기자
 다만 일제시대에 이곳에서 이태준, 정지용, 이효석, 이은상 등이 문학활동을 했다고 한다. '이태준가옥'이 바로 길 건너편에 위치해 이를 뒷받침한다.

 토지대장상으로 소유자의 변천을 보면 1956년 대림산업㈜이 매입한 후 1960년 이재준 회장의 고종사촌형 이석구 전 대림산업 사장이 소유하게 됐다. 1972년에는 이재준 회장의 아들 이준용 현 대림산업 명예회장으로 변경됐다. 1985년 11월 덕수교회에서 인수할 당시 이종석별장은 폐가 직전이어서 허물려고 했다는 게 교회 관계자의 설명이다.

 실제로 1976년 서울시 조사 당시에도 건물은 행랑채 퇴부분과 사랑채 서까래가 썩어서 내려앉아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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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이종석별장 안채 내부. / 사진=김유경기자
 덕수교회 관계자는 "교인 중에 한옥을 잘 아는 분이 있어 개·보수 후 목사 사택으로 17년간 쓰다 2003년 1년간 수리해서 영성수련원으로 쓰고 있다"며 "2006년에는 아예 해체해서 썩은 나무들을 들어내고 신축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한옥은 조립이 가능한 특징이 있어 전체를 해체한 후 일부 재료만 교체해 원상태로 복구(신축)할 수 있다. 문제는 재료조달과 비용이다. 교체할 재료를 다른 비슷한 연대의 문화재로부터 공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비용도 만만치 않다. 2006년 신축 때 든 비용이 5억~6억원에 달했다.

 이종석별장은 대림산업 창업주가 소유하기 이전 삼양사 창업주도 소유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종석별장을 17년간 사택으로 쓴 손인웅 목사에 따르면 1924년쯤 덕수교회 창립교인 중 한 명이 비어있는 병약한 장녀를 위해 이 집을 요양소로 빌려썼는데 이후 삼양사 창업자 김연수 회장이 인수해 별장으로 사용했다.

 1945년 해방 직후에는 유상준이 별장으로 사용하다 6·25 때 납북당해 그 가족들이 이 집에서 많은 고생을 하며 살았다는 얘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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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이종석별장 안채 / 사진=김유경기자
 이종석별장은 덕수교회 본관과 교육관 사이의 골목길을 따라 끝까지 올라가면 언덕 비탈 아래에 위치한다. 평소에는 자물쇠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방문하려면 미리 교회에 요청해야 한다.

 교회 관계자는 "처음에는 문을 열어뒀으나 가출청소년 또는 걸인들이 몰래 숨어드는 경우 관리문제가 발생했다"며 "무엇보다 화재 우려가 있어 닫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사전에 방문 요청을 하면 평일이나 주말 낮시간에는 집구경이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는 서울시 전체 한옥의 11.8%인 1618채가 밀집돼 있다. 주말이면 등산복 차림의 사람들이 삼삼오오 성북동 걷기여행을 즐기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성북동 도보투어 코스는 최순우 옛집→선잠단지→이종석별장→심우장→상허 이태준 가옥(수연산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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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에서 내려다본 성북동 이종석별장 전경 / 사진=김유경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