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活文化/세상이야기

만물상 - 간병(看病)

바람아님 2014. 4. 9. 09:02

(출처-조선일보 2014.04.09 이명진 논설위원)


'그의 숱 많은 머리칼이 수시로 한 움큼씩 빠져 단시일 내에 아주 없어져 가는 걸 지켜보는 마음은 뭐라고 형용할 수 없이 우울하고 참담했다. 그때부터 자식들이 아버지를 위해 모자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박완서가 쓴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1991)은 폐암으로 먼저 보낸 남편 간병기(記)다. 작가는 절망도 긍정으로 바꿨다. 머리카락 한 오라기 없는 남편 머리를 '갓난아이 두상(頭像)'이라 했다. 보일락 말락 솜털이라도 돋으면 '장차 머리카락이 될 희망'이라 했다.

▶병실 바닥에 온돌을 들인 병원이 꽤 있다. 특히 제주가 그렇다. 돌보는 가족이 환자 곁에서 밤을 새우며 등이라도 지지라는 배려다. 아들·딸·며느리·손자가 돌아가며 자고 이튿날 직장으로 학교로 간다. 회진(回診)하는 의사도 병실에 신발 벗고 들어간다. 우리네 간병 문화는 세계에서 유별나다. 환자 침대 옆에 간병인 보조 침대 둔 나라가 또 있을까. 중풍·치매 걸린 시부모 수십 년 지극 봉양한 착한 며느리 이야기가 드물지 않다. 20년 전 나온 간병보험은 힘도 못 써보고 판매가 중단됐다. 가족이 곧 보험이니까.

[만물상] 간병(看病)
▶그래도 "긴 병에 효자 없다" 했다. 10년 뒤면 100만명을 넘긴다는 노인성 치매 환자 가족이 겪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치매는 환자의 뇌와 인격뿐 아니라 가족의 삶도 망치는 가정 파괴범이다. 
식물인간 아들을 25년 돌본 아버지, 아내 병 수발 26년 들던 노인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소식이 잇따랐다. 
얼마 전엔 아이돌 스타 아버지가 치매 앓던 부모와 함께 세상을 등졌다. '간병 살인'이라는 말이 낯설지 않다.

▶우리만큼이나 '간병 스트레스' 큰 나라가 일본이다. 일본에서 간병 때문에 직장을 떠나는 사람이 해마다 10만명 넘는다는 기사가 어제 조선일보에 실렸다. 부모 모시고 사는 40대 이상 직장인 남자의 13.5%, 여자의 27.6%가 간병하느라 직장을 관둔 적이 있다고 한다. 아예 사회복지사로 전직해 부모 수발하고 돈도 버는 경우도 있다. 장수 대국 일본의 그늘이다. 남의 일 같지 않다.

▶2010년 일본의 기대수명은 82.6세, 우리는 79.7세다. 건강수명은 일본 73.1세, 우리는 70.3세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마지막 10년은 병치레로 골골한다는 얘기다. 수명 느는 만큼 치료비도 늘게 마련이다. '100세 시대'에도 착한 며느리 찾기가 쉬울까. 간병 문제를 효심(孝心), 가족의 희생으로 풀던 시기는 지났다. 개인의 존엄한 삶과 죽음을 보장하는 일은 국가·사회가 나눠 져야 할 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