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사진칼럼

허영한의 사진 前後 - 사진이 증명하지 않는 것들

바람아님 2014. 4. 20. 20:42

(출처-조선일보 2014.02.06 허영한 멀티미디어영상부 차장)

사진은 기록·추억에 그치지 않고 不在·喪失을 웅변하는 역할도 해
'완벽한 그림'에 욕심 내기보다 찍어놓은 작품 속 의미 들춰봐야
'저장'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고 촬영자와 타인에게 널리 읽혀져야


얼마 전 갑자기 유명(幽明)을 달리한 친구의 빈소에서 그의 영정 사진을 보고 잠시 마음이 무거웠다. 쉰 살을 앞둔 친구 대신 '잠자리 안경'을 쓴 앳된 청년이 표정도 인상도 생략된 흑백 사진 속에 있었다. 20대 중반쯤 입사원서에 썼을 법한 증명사진이었다. 업무의 전산화와 함께 사진 또한 디지털화되면서 직장의 인사 전산망에 누군가가 작은 증명사진을 스캔해서 등록했을 것이다.

그 조그만 사진 파일을 받아 확대를 거듭해서 뽑았을 가능성이 높은 영정 사진은 흐릿한 윤곽으로 그를 말하고자 했으나 그의 존재를 증명하지는 못했다. 그 사진은 이제 그가 없음, 다시 말해 부재(不在) 증명의 역할을 간신히 하고 있었다. 무엇인가 혹은 누군가의 사실적인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사진의 기본 역할을 거의 하지 못하는 증명사진은 그가 이제 세상을 떠났음을 더 무겁게 알려주는 듯했다.

상실이나 사라짐은 사진이 지닌 기능적 역할과는 다른 교류의 시작이다. 증명사진 한 장도 몇 단계의 공정을 거치면서 입자가 깨지고 화질이 손상된 뒤 보는 사람들의 마음에 더 무겁게 다가온다. 흑백 사진에 컬러 사진보다 더 많은 이야기가 담기기도 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우리는 사진이 과거나 현재의 사실을 증명하는 것으로 알아 왔다. 사진은 사람들에게 추억을 불러일으키지만, 그것은 사진 속에 남은 것들이 지금은 사라졌음을 웅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진가들은 물론이고 카메라를 가진 모든 사람이 기록하고 남기고 싶어하는 것들은 지나가면 없어지는 현재의 많은 사실에 대한 아쉬움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진의 기록하는 기능에 대한 이야기다.
기사 관련 일러스트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상상을 뛰어넘는 성능의 좋은 카메라와 장비들이 매일 쏟아져 나오지만 많은 사진가는 불편을 감수하고 필름 사진을 고집한다. 산간오지에서도 흑백 대형 필름에 사진을 찍으며 구도(求道)에 가까운 고통을 감수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들이 문명의 편리함을 버리고도 담고자 하는 다른 세계가 엄연히 있다. 사진은 결과물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과정과 해법에 담기는 무형의 세계가 지닌 힘이 더욱 엄중하다.

지금 없다는 사실을 포함해 사진 속의 사라지거나 숨겨진 이면에 오히려 외형으로 드러난 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와 메시지가 들어갈 수 있다. 누구나 써도 글이지만 같은 사실을 쓴 모든 글이 같지 않듯이, 누구나 찍어도 사진이지만 모든 사진이 같은 내용을 담는다고 해서 같은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사진은 글과 달리 관객의 상상과 자기화된 이야기에서 완성된다. 한 장의 사진을 두고 보는 사람마다 다른 느낌과 평가를 하는 이유다.

사진에 관심과 의욕이 많은 한 후배는 기회 있을 때마다 나에게 '간절히 찍고 싶었지만 찍지 못한 사진이 있는가'를 묻곤 한다. 나는 그때마다 "없다"고 잘라 말하지만, 20년 넘게 사진기자를 한 사람이 그런 순간이 없다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는 일하는 것도 사진 찍는 것도 늘 성실하고, 사진을 인생에서 정복하거나 이루어야 할 목표로 생각한다.

주변에서 이런 사진 애호가를 만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는 수시로 불안하다. 사진이 흔들릴까 해서 셔터스피드를 걱정하고, 초점과 노출과 안정된 구도를 고민한다. 더 좋은 렌즈로 선명한 이미지를 담고 싶어 하고, 가장 좋은 자리를 놓치지 않으려 노력한다. 하지만 그는 사진에 담기는 더 많은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 모든 것을 완성해야 한다는 의식 때문이다. '좋은 사진'보다 '완벽한 사진'을 찍고 싶은 것이다.

물론 내가 찍고 싶었지만 찍지 못한 사진이 없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사진 하는 많은 사람에게 찍지 못한 사진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다. 그러나 카메라라는 도구를 써서 기록했지만 기억에서 사라지고 데이터라는 전자적 형식으로만 남은 순간은 찍지 못한 사진에 비해 무엇이 우월한가.

나는 "좋은 사진을 찍고 싶다면, 사진 찍는 일에만 매달리지 말고 지금까지 찍어놓은 사진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라"고 이야기한다. 그 속에 사진 찍는 순간 미처 깨닫지 못한 이야기들이 숨어 있을 것이고, 자기 이야기마저 읽어내지 못하는 사진은 쌓여서 쓰레기밖에 안 될 것이다. 문명세계에 사는 거의 모든 인류가 사진을 찍는 지금, 잘 찍거나 꼭 내가 찍어야 하는 사진의 의미는 절대적이지 않다.

기능은 사진이 지닌 세계의 극히 일부가 되어가고 있다. 사진은 찍히는 대상이나 방식 못지않게 보는 사람과의 교류가 중요해졌다. 내 사진에 대한 다른 사람의 반응이 아니라 그들에게 내 이야기가 전해지는 방식이나 양태를 살필 필요가 있다. 사진은 저장장치에서 나와서 찍은 당사자를 포함한 여러 사람에게 읽혀야 한다.

사진이 증명해야 하는 것은 누군가가 찍었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그리 많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진의 역할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가 넓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