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사진칼럼

허영한의 사진 前後 - 사진과 思惟, 그리고 文章

바람아님 2014. 4. 22. 22:22

(출처-조선일보 2014.04.17 허영한 멀티미디어영상부 차장)

名文이 깊은 생각의 결과물이듯 좋은 사진도 視線 고심에서 탄생
김아타 作法 한동안 유행 탔지만 哲學 없는 模作 사진은 의미 없어
'무엇으로 세상에 얘기를 건넬까' 사진 본령은 여전히 통찰 아닐까

허영한 멀티미디어영상부 차장 사진'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소설가 김훈의 명저 '칼의 노래'는 이렇게 시작한다. 
개정판에 실린 작가의 말에 의하면 '버려진 섬마다 꽃은 피었다'로 쓸지, 조사(助詞)를 '이'로 할지를 
고민했다고 한다. '은'은 주관적이고 신파적이다. '이'는 객관적이고 냉정하다.

전쟁 통에 사람들이 버리고 떠난 섬에도 봄이 와서 꽃이 피었다는 것은 객관적 사실이다. '은'을 쓰자면 '섬은 버려졌고, 사람들은 흩어졌는데, 그래도 꽃은 또 피었고…' 하는 서러움이 묻어난다. 조사 '이'를 쓰면 난리는 사람들끼리의 일이고, 꽃은 그래도 핀다는 사실을 우선시한다. 
객관은 엄중하고, 주관은 서럽다. 글의 중심은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깊은 문장은 사유(思惟)에서 
완성된다. 단어 하나, 조사 하나의 역할이 막중하다.

글의 역할을 빌려 사진을 이야기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구름이 걸린 높고 푸른 산, 좁은 찻길 가에 세워진 볼록거울이 있다. 이 거울은 특이하게도 차가 지나간 뒤에 차의 모습이 비친다. 굽은 길 때문일 것이다. 그 거울 속으로 빨갛고 작은 승용차도 지나갔고, 노란 차도 지나갔고, 검은색 트럭도 지나갔다.

나는 이 사진을 세상에 내보일 때 빨간 차를 택했다. 여러 사진 중에서 차의 색깔을 고르는 것은 문장의 조사나 단어를 결정하는 문제와 비슷하다. 문장의 높낮이와 호흡은 사진 속 시선의 움직임과 상통한다. 빨간 차는 '은', 트럭은 '이'쯤의 차이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관객에 따라 받아들이는 것이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사진도 글도 실재(實在)가 아니지만, 우리의 기억과 연상 속에서 실재와 같은 느낌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한때 사진가 김아타의 '뮤지엄 프로젝트' 시리즈 작품들을 따라 하는 학생과 젊은 사진가들이 꽤 있었다. 
벗은 사람들을 아크릴 통 안에 매달거나 눕히거나 앉히고 촬영한 사진들을 졸업전시회 같은 곳에서 보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알프스의 깊은 산중 굽잇길 볼록거울은 만물을 담지만, 거울 속 수많은 형상 중 무엇을 포착할 것인가는 촬영자의 몫이다. 조사(助詞) 하나에 문장가의 고뇌가 묻어나듯, 사진 속 작은 액자는 사진가에게 선택과 고민의 순간이다. /허영한 기자
오스트리아 알프스의 깊은 산중 굽잇길 볼록거울은 만물을 담지만, 거울 속 수많은 형상 중 무엇을 포착할 것인가는 촬영자의 몫이다. 조사(助詞) 하나에 문장가의 고뇌가 묻어나듯, 사진 속 작은 액자는 사진가에게 선택과 고민의 순간이다. /허영한 기자
그런데 지금 그 사진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나를 발견하겠다'며 이런 사진들을 따라 하던 이들은 척박한 생업(生業) 전선에서 분투하며 스스로를 잊고 살지는 않을까. 
사진의 완성 경로에 사람의 내면과 관계된 보이지 않는 것들을 생략해 잘 찍히거나 멋지기만 한 사진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잊혀진 경우는 허다하다. 작가가 심취한 것은 동양철학과 불교였고, 그의 사진들은 오래된 사유의 결과물이었다.

19세기 초반 공식적으로 사진술(寫眞術)이 공표된 뒤 100년 동안 찍힌 사진들보다 지금 하루에 찍히는 사진이 훨씬 많다. 
공부 잘하는 것과 더불어 사진 잘 찍는 것도 '레드 오션(red ocean)'이 돼버렸다. 둘 다 어지간해서는 경쟁에서 이기고 세속적으로 성공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사진을 잘 찍기 위해서 물질적으로나 기술적으로 부족한 것은 이제 그리 많지 않다. 
쉽게 찍어주는 카메라는 넘쳐나지만, 좋은 사진을 알아서 찍어주는 카메라는 아직 없다. 문명과 기술의 발달은 사람들로부터 
감성과 생각의 기회를 앗아갔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다고 믿게 만들었다. 그래서 잘 찍는 것과 별개로 좋은 사진은 여전히 어렵다.

사진을 잘 찍는 것에 대해서 나는 할 말이 별로 없다. 다행히 내가 하지 않아도 그것에 대해 이야기해 줄 사람은 이 땅에 수만 
명은 족히 될 것이다. 
사진 잘 찍는 것에 대한 동경을 넘어 좋은 사진을 고민한다면 차라리 사진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가를 먼저 생각해 보는 것이 
더 효과적이지 아닐까 싶다. 
돈을 벌 것인가, 폼을 잴 것인가, 사기를 칠 것인가. 아니면 간혹 세상에 말이라도 몇 마디 건네고 싶은가.

현실에서 예술이나 소통으로서의 사진은 말과 집단주의의 무게에 짓눌려 은둔에 들어갔고, 사진의 기능들은 장난과 즉흥의 
소비재로 전락하기도 한다. 
사진가의 상상력보다는 '뽀샵'의 능력이 더 막강하다. 
표현 매체가 주는 즐거움 자체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진의 역할을 존중하는 애호가라면 무엇으로 세상에 이야기를 건넬 것인가 하는 문제야말로 가장 막막한 벽이다.

문장이건 이미지건 사람의 이성과 감성을 거친 산물은 온전히 별개로 존재하지 않는다. 
통찰의 진수가 담긴 문장 하나에서 세상을 느낄 수도 있고, 
풀 한 포기를 찍은 사진에도 명문(名文)같이 깊은 사유가 담길 수 있다. 
치솟는 열정(때로 탐욕도 이를 사칭한다)이 더 이상 답을 구하지 못할 때, 사진 한 장 없는 오래된 책 한 권을 숙독(熟讀)해 보는 것은 어떨까. 의욕이 생긴다면 글을 공책에 따라 써보는 것도 권할 만하다. 많은 생각이 따라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