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제갈량은 결국 정권 지켜냈다…尹도 李도 필요했던 '읍참마속'

바람아님 2024. 3. 24. 06:10

중앙일보 2024. 3. 24. 05:00

228년 제갈량은 20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한중에 진을 쳤습니다. 5년간 뼈빠지게 육성한 군대였습니다. 훗날 제1차 북벌로 불리는 이 군사작전은 유비가 죽자 “이제 촉한(蜀漢)은 걱정할 것 없다”고 안심했던 위나라의 허를 찌른 대규모 공세였습니다.

제갈량의 준비는 치밀했습니다. 촉한의 군사가 한중을 넘었을 때 위(魏)와 촉의 국경지대에 있던 남안·천수·안정 등 3개 군에서 동시에 제갈량에 호응했고, 장안 등 위나라의 서쪽 국경은 일대 혼란에 빠졌습니다. 사서는 ‘위나라의 조야가 모두 두려워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승패는 예상치 않았던 곳에서 갈렸습니다. 제갈량은 신예 마속에게 요충지 가정(街亭)에서 위나라 구원군을 막도록 했는데, 마속은 엉뚱하게 산꼭대기에 진을 쳤다가 포위로 고립되면서 대패했습니다.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은 제갈량은 결국 북벌을 중단하고 철수합니다. 그리고 그는 눈물을 흘리며 마속의 목을 베었습니다. 잘 알려진 ‘읍참마속(泣斬馬謖ㆍ울며 마속을 베다)’의 유래입니다. 읍참마속은 인사의 모범으로 꼽히지만, 역사가들 사이에선 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마속을 꼭 죽여야 했느냐 등 반론도 만만치 않았던 것이죠.

이번 총선에서는 여야에 두 가지 대표적인 악재가 있습니다. 국민의힘은 이종섭 호주대사 임명과 황상무 전 대통령실 시민사회수석의 '회칼테러' 발언 논란, 더불어민주당은 '비명횡사' 공천입니다. 다른듯 해도 본질은 비슷합니다. '내 사람' 챙기기에 따른 무리수라는 측면에서 그렇습니다.

읍참마속이 후대까지 전해진 것은 그 대상이 마속이기 때문입니다. 제갈량 자신이 키우고, 자신이 속한 형주파의 차기 리더 마속을 찍어낸 것은 정치적 희생이자 결단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했기 때문에 악화한 여론은 가라앉았고 익주와 유장 그룹도 반기를 들 수 없었습니다.... 마속 대신 정권을 살렸기에 제갈량은 만고의 재상으로 남았다는 점을 여야 지도자 모두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https://v.daum.net/v/20240324050054646
제갈량은 결국 정권 지켜냈다…尹도 李도 필요했던 '읍참마속'

 

제갈량은 결국 정권 지켜냈다…尹도 李도 필요했던 '읍참마속'

228년 제갈량은 20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한중에 진을 쳤습니다. 5년간 뼈빠지게 육성한 군대였습니다. 훗날 제1차 북벌로 불리는 이 군사작전은 유비가 죽자 “이제 촉한(蜀漢)은 걱정할 것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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