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 2024. 6. 15. 00:11
[작품편 108. 앙리 루소]
마흔아홉에 전업 화가된 남자
“그림 배꼽 빠진다” 바보 취급
“나는 현대적 스타일서 최고”
<동행하는 작품>
잠자는 집시, 전쟁, 꿈
늦깎이 ‘괴짜’ 화가의 탄생
루소는 나이가 마흔 줄이 닿고서야 회화계에 뛰어든 예술가였다.
늦깎이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가 서른 살쯤, 폴 고갱이 서른다섯 살께 전업 화가가 된 사례와 견줘봐도 압도적으로 늦은 것이었다. 그에게 별난 점은 더 있었다. 평생 제대로 된 그림 교육을 받은 적도, 늦게나마 받을 뜻도 없다는 게 그것이었다. 그렇다면 돈이 차고 넘치는 부자였는가. 좋은 가문과 든든한 뒷배를 두고 있었는가. 이 또한 아니었다. 그런 그가 괴짜 기질을 보이며 전통과 유행 중 어디도 따르지 않은 채 그림을 그리고 있었으니, 놀림의 제물이 될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다.
1844년 프랑스 라발에서 출생한 루소는 원래 화가를 할 생각이 없었다.
가난한 배관공의 아들이었던 그는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채 바로 돈벌이를 했다. 루소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심부름꾼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런 그는 얼마 안 돼 충동적으로 남의 돈과 우표를 훔쳤고, 이는 곧 발각되고 말았다. 결국 멱살이 잡힌 채 경찰서로 끌려갔다. 루소는 절도죄를 사면받는 조건으로 7년간 군 생활을 할 처지에 놓였다. 그는 졸지에 군악대 소속 클라리넷 연주자로 복무해야 했다. 그러다 입대 5년 차에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접했고, 집안의 가장이 된 그는 이 건으로 인해 조기 제대할 수 있었다. 잡일을 전전하던 루소는 1871년에 파리의 말단 세관원으로 취직했다.
루소는 때마침 이웃집에 살던 화가 펠릭스 클레망이 그림으로 막대한 부를 쥐는 걸 봤다. 이를 계기로 진지하게 화가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림은 곧잘 따라 그린다고 칭찬받던 옛 시절도 떠올렸다.
루소는 이쯤부터 일요 화가라고 불리며 살았다. 이는 주중에는 일, 주말에만 붓을 쥐는 삶을 의미했다. 사실은 예술을 앞에 두고 '깔짝'거리기만 한다는 멸칭에 가까운 용어였다. 그는 놀림과 조롱 속에서 꿋꿋이 직장 근처 풍경을 그리고, 미술관을 돌며 거장의 작품을 베끼는 식으로 독학을 지속했다. 루소는 마흔한 살이 된 1885년에 기어코 살롱전 참가 꿈을 이뤘다.
파란만장한 삶을 산 루소는 〈꿈〉을 완성한 1910년, 봉와직염 등 악화로 영영 눈을 감았다.
어쩌면 그토록 바란 진짜 부자의 삶을 누릴 수 있었을 그 무렵, 안타깝게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꿈〉을 완성한 예순여섯 살 나이였다. 루소에 대한 실질적 평가는 그의 사후에 본격적으로 이뤄지기 시작했다. 1924년에 초현실주의 선언을 발표한 작가들은 쟁쟁한 예술가를 다 제쳐두고 루소를 '초현실주의의 아버지'로 지목했다. 시대를 앞선 위대한 화가였다는 걸 인정한 격이었다. 그리고 루소가 피카소의 파티에서 한 말처럼, 오늘날에는 많은 이가 그를 모더니즘의 대부로 칭하고 있다. 정말이지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https://v.daum.net/v/2024061500115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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