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 2024. 6. 8. 00:11
[작품편 107. 수잔 발라동]
모델에서 화가로
<동행하는 작품>
자화상
아담과 이브
푸른 방
"어이, 딴생각은 그만하지 그래?"
쉰일곱 살의 노화가 퓌비 드 샤반이 열여섯 살 소녀 수잔 발라동에게 핀잔을 줬다. "내가 그리는 걸 왜 자꾸 흘깃 보고 그러는가? 모델이면 포즈를 잡는 데 더 신경을 쏟으면 좋겠군." "아…. 네! 그럴게요." 발라동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무너진 자세를 잡기 위해 턱을 다시 들었다. 그런 발라동은 또 얼마 안 돼 시선을 샤반 쪽에 두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샤반을 보지 않았다. 그가 하는 행동을 보고 있었다. 아하, 구도는 저렇게 잡고 명암은 저런 식으로 하면 되겠구나. 그녀가 머릿속으로 또 생각하는 순간…
"어이!"
샤반이 발라동에게 대고 소리쳤다. "발라동 양. 지금 집중을 못 하는 건가? 아니면 안 하는 건가?" 마음 상한 그가 또 호통을 쳤다. "자네, 요즘 좀 수상해. 오늘 그림 작업은 여기까지 할 테니 뒷정리나 해주게. 주방과 침실 청소도 잊지 말고." 샤반의 말에 발라동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프랑스가 누린 벨 에포크 시절, 화가의 모델이 그날 하녀 역할까지 도맡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작업실 청소를 마친 발라동은 설거지를 하고, 이어 샤반의 이부자리까지 펼쳤다. '나도 어쩌면….' 발라동은 그 많은 일을 하면서도 한 가지 생각만 했다. '나도 어쩌면, 그림을 그릴 수 있지 않을까.' 샤반의 의심이 맞았다. 그녀에겐 꿍꿍이가 있었다. 그것도 어리고, 가난하고, 가방끈도 짧은 당시 여성으로는 품기 힘든 마음을 품고 있었다. 화가의 꿈이었다. 그녀가 이젤 앞 모델로 서면서도 샤반의 작업을 곁눈질로 본 건 이 때문이었다.
발라동은 모델 일을 하는 틈틈이 그린 자화상 등 자기 그림을 샤반에게 건넸다. 이를 받아든 샤반은 잠깐 눈동자를 굴리는 듯했다. "…같아." "선생님. 뭐라고요?" 기대에 찬 발라동의 되물음에 샤반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곤 더 큰 목소리로 말을 툭 뱉었다. "쓰레기 같은 그림이라고 했어."
발라동은 샤반의 이러한 악담을 잊지 못했다. 그나마 점잖다고 봐 마음을 줬던 샤반의 민낯을 본 후 망설임 없이 연을 끊었다. 발라동은 다시 거리에 섰다.
발라동은 또 골목길에 우두커니 섰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간 겪지 못한 몸의 변화를 느꼈다. 임신이었다. 그녀는 곧 열여덟 살 몸으로 출산을 경험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내 아들이 아니다." 샤반과 르누아르 등 그녀를 거친 남자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사생아를 낳은 셈이었다.
https://v.daum.net/v/2024060800113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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