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 2024. 6. 29. 00:11
[작품편 110. 카미유 피사로]
<동행하는 작품>
흰 서리
빨래를 너는 여인
겨울 아침 몽마르트의 거리
"살롱전(展) 심사위원들 말이오. 그놈이 그놈인 그림만 뽑는 행태가 점점 심해지고 있소."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 언덕 인근의 카페 게르부아(Cafe Guerbois). 예술가 무리가 잔을 쥔 채 불만을 토로했다. 클로드 모네와 오귀스트 르누아르 등 젊은 화가는 에두아르 마네를 중심으로 모였다.에드가 드가와 몇몇 예술가는 이들과 살짝 떨어진 채 이따금 고개를 내밀었다.
카미유 피사로. 까끌한 회색 수염을 길게 기른 화가가 정적을 깼다. "나는 우리가 살롱전에 맞서 완전히 새로운 전시회를 열어야 한다는 데 공감하오. 필요하면 내가 직접 나설 생각이오." 그가 작심하고 한 말이었다. "피사로 선생이 그런 뜻이라면…. 같이 힘을 보태겠소." "저도 피사로 선생님과 함께 하겠습니다." 새로운 시도에 주저하던 여러 예술가가 이 남자의 구상에 곧장 지지를 표했다. 다만, 다른 어떤 이도 아닌 '피사로가 주도한다'는 조건으로. 전설은 그렇게 시작됐다.
피사로를 정신적 지주로 둔 무명 예술가 협회가 그들만의 전시회를 개최했다. 전시에는 드가, 모네와 르누아르, 별종 폴 세잔과 홍일점 베르트 모리조 등 30여명이 참여했다. 살롱전에선 볼 수 없던 그림이 줄줄이 내걸렸다. 가령 모네의 〈인상, 해돋이〉, 르누아르의 〈극장 박스석〉 같은 흐릿한 선과 색채를 품은 작품들이었다. 이날 이곳에서 19세기 후반 미술계를 강타할 '인상주의'라는 말이 태동한다. 하지만 이는 후세의 평가일 뿐, 당시에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야심차게 문을 열었지만 방문객도 하루 백 명도 되지 않았다. 찾아온 이들도 그림을 보고 낄낄대기에 바빴다. 애초에 '인상주의'라는 말 또한 "대상의 인상만 대충 그렸다"는 식의 조롱일 뿐이었다.
(중략)
많은 이가 피사로를 이렇게 기억했다. "내가 아는 가장 위대한 거장은 피사로와 모네였다. 하지만 이 중에서 딱 한 명만 꼽자면 피사로였다." 피사로가 죽고 3년 뒤 세잔은 그의 생애 마지막 전시에서 이같이 말했다고 한다.
https://v.daum.net/v/20240629001128594
‘흰수염’ 노인 죽자 온동네 펑펑 울었다…“형님, 스승님, 교주님!” 누군가했더니[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카미유 피사로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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