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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만한 듯, 아득한 킬리만자로.. 표범은 흔적조차 없었다

바람아님 2014. 6. 19. 11:57
    1926년 킬리만자로(해발 5895m) 꼭대기에서 영국 탐사팀이 표범 시체를 발견했다. 일행은 증거로 표범 귀를 잘라왔다. 1936년 미국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발표한 소설 '킬리만자로의 눈'은 이렇게 시작한다. "서쪽 정상은 마사이족 말로 응가예 응가이, '신의 집'이라 한다. 그 근처에 표범 한 마리가 말라 죽어 있다. 왜 그 높은 곳까지 올라갔는지 아무도 모른다."

1985년 대한민국 가수 조용필이 발표한 노래 '킬리만자로의 표범'에 표범이 재등장했다. 그래서 킬리만자로에서 한국인은 늘 묻는다. 표범은 어디 있는가. 가이드들은 늘 대답한다. '한국인들은 오기만 하면 표범 타령인가.' 정답은 '아무도 본 적이 없다'다. 가왕(歌王) 조용필의 노래로 킬리만자로는 한국인에게 '로망'이 되었다. 로망은 대개 비현실적이다.

탄자니아에 있는 아프리카 최고봉 '킬리만자로'는 마사이어(語)로 '흰 눈의 산'이다. 원색 아프리카 위로 만년설을 뒤집어쓰고 솟아 있으니 그 첫 대면 때 받는 위압감과 숭고미는 어디 비길 데가 없다. 제대로 알고 오른 사람들은 정상 정복이라는 환희와 함께 몇 가지 인생 고민에 대해 선(禪)적인 깨우침을 얻기도 한다. 그런데 산 아래 차가(Chagga) 부족 말로는 '새도 못 갈 산'이다. 코앞에 보인다고 멋모르고 덤볐다가 낭패를 당하는 사람도 있다.

마흔 아홉 먹은 나도 그 중 하나였다. 히말라야 5000m 봉우리도 가봤지만 킬리만자로는 달랐다. 태어나 그렇게 이를 악물고 최선을 다해 걸어 본 적이 없었지만, 결국 정상 30분 앞에서 포기했다. 죽을까 봐. 그런데 꿈에서 깨어난 듯, 이만큼 다시 가고 싶은 산도 없었다. 외형적인 로망과 그 로망 뒤에 숨어 있는 현실이 공존하는 산, 킬리만자로다.

킬리만자로를 오르는 공식 루트는 여섯 개다. 제일 쉬운 마랑구 루트는 별명이 코카콜라 루트다. 산장에서 자면서 경치 구경하며 오른다. 쉽다는 선입견으로 인해 오히려 정상 정복 확률이 가장 떨어지는 루트다.

가장 성공 확률이 높은 루트는 롱가이 루트다. 가장 덜 붐비는 루트이기도 하다. 서서히 고도를 높여가며 올라가 마지막 키보 산장에서 밤새 걸어 정상을 밟고 내려오는 5박6일 코스다. 열대우림에서 출발해 고산 사막지대(Alpine Desert)라 불리는 삭막한 공간과 만년설을 경험하게 된다. 그동안 텐트 생활을 한다. 캠핑 장비, 음식은 한 사람당 3~4명씩 따라붙는 포터들이 짊어지고 간다.

# 1일째 "우리가 미쳤어, 저길 올라가?"

입산 절차를 밟고 점심 무렵 해발 1950m 롱가이 루트 시작점에서 출발했다. 보라색꽃 만발한 감자밭을 지나 송림을 뚫고 가니 열대우림이 나왔다. 북한산 소풍 나온 서울 사람처럼 긴장감은 전혀 없다. 잡목 너머 구름 위로 하얀 봉우리가 보였다. 구름보다 높았고, 그 옆으로 비행기가 스쳐갔다.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미쳤지, 저길 올라가?" 농담 속에 슬슬 긴장감이 스며들었다. 등반대장 샘이 말했다. "저게 10년 전에는 온통 눈이었다. 지금은 사막이 됐다."

3시간 만에 심바(Simba) 캠핑장에 닿았다. 스와힐리어로 '사자'라는 뜻이다. 해발 2750m. 이미 백두산 높이다.

# 2일째 구름 속 잡목지대

두 번째 캠핑장 키켈레와까지는 7시간이다. 거리는 7㎞에 해발고도는 3450m. 길 왼편 케냐 평원 위로 구름이 몰려왔다. 등산길 주변 나무들은 키가 점점 낮아진다. 3000m를 넘으면서 걸음걸이가 슬로모션으로 바뀐다. 공기 중 산소 농도가 감소하면서 갖은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두통, 구토, 환각 기타 등등. 가이드는 '뽈레 뽈레(Pole Pole)', 천천히 걸으라고 했다.

운무가 깔리는 계곡 건너 캠핑장이 보였다. 오른편에는 킬리만자로의 제2봉 마웬지봉이다. 그날, 킬리만자로에 짙은 석양이 내려앉았다. 케냐 평원은 구름에 덮여 있다. 구름 속 심박동 101, 산소 포화도는 85로 아직 정상.

# 3일째 가파른 풀밭, 그리고 호수

탁 트인 풀밭이 가파르게 이어졌다. 4시간 만에 마웬지 탄 캠핑장에 도착했다. 해발 4330m. 마웬지봉 아래에 있는 작은 호수다.

곧바로 마웬지봉 오른쪽 바위 능선으로 고도 적응 훈련에 들어갔다. 작은 절벽을 오르자 그 뒤로 거대한 평원이 모습을 보인다. 화성(火星) 표면을 닮은 거친 고산 사막지대다. 정면 구름 속에 킬리만자로 주봉 키보(Kibo)가 보인다. 가이드 이스라엘이 묻는다.

"얼마나 걸릴 것 같나?" "두 시간?"

"…사람 눈 믿지 마. 저기, 짧아야 다섯 시간이야." 이날 혈중 산소가 76%로 나왔다. 70% 이하로 떨어지면 조짐이 좋지 않다고 했다.

그날 밤 캠핑장에 쌓여 있는 돌탑들 위로 은하수가 떠올랐다. 대장엄(大莊嚴) 아래에서 오래도록 잠을 이룰 수 없었다.

# 4일째 달 표면 같은 비현실

풀 한 포기 제대로 보이지 않는 사막 끝에 산 하나가 구름에 쌓여 있다. 구름 아래 집들이 몇 채 보인다. 오늘 도착할 키보 산장이다. 9㎞, 최소 5시간, 고도는 4700m. 잡힐 듯 가까워 보이던 목적지가 그리 멀었다. 모든 것이 비현실적이었다.

몽롱한 머릿속도 비현실적이었고 달팽이 같은 걸음걸이 속도도 비현실적이었다. 쏟아붓는 태양열에 사막은 아지랑이로 일렁댔다. 겨우겨우 걸어서 키보 이정표를 움켜쥔 뒤 잠에 빠져들었다. 오늘 자정에 출발해 수직 고도를 1000m 높여 정상으로 간다. 25도 급경사 모래 절벽을 지그재그로 올라야 한다.

# 4일째 밤, 마(魔)의 길만스 포인트

암흑 속 악마처럼 이빨을 내민 바위틈 모래 위로 토끼길이 나 있다. 헤드랜턴과 별빛만으로, 앞사람 꽁무니만으로 이정표를 삼아 산을 오른다. 발과 다리가 저절로 알아서 산을 오른다. 중간 쉼터 여기저기에서 탄식이 터졌다. 급격한 고도 상승으로 인해 고산증의 대표적인 증세들이 폭포수처럼 인간계에 쏟아졌다.

"나, 깜짝 놀라서 깨어보니 걷고 있더라." 가이드 이스라엘이 나를 쳐다봤다.

"그럴 수 있다. 그래도 올라가자."

"나, 여기에서 포기하면 안 될까. 쉬고 싶다."

"너, 그렇게 앉아 있으면 죽는다."

협박 반 걱정 반을 퍼붓는 이스라엘 배낭끈을 잡고 꿈을 꾸며 올라갔다. 아무리 심호흡을 해도 숨이 막혔다. 내 목소리가 라디오 소리처럼 들렸다. 그렇게 다섯 시간 걸려 벼랑 꼭대기, 길만스 포인트(Gilman's Point·5685m)'에 닿았더니 해가 뜨는 것이다. 발아래에는 눈이 쌓여 있고 앞에는 까마득한 분화구였다. 분화구 건너편에는 아직 녹지 않은 빙하가 서 있었다. 희미한 의식 속에서도 그 풍경은 하나하나가 장엄했다.

그러다 정상 쪽 구름 속을 보며 소름이 돋았다. 사람 같은 검은 물체가 구름 속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이젠 헛것까지 보인다, 생각하며 셔터를 눌렀다. 나중에 보니 브로켄의 요괴(Brocken spectre)였다. 산 정상 앞 짙은 안개에 해를 등진 자기 그림자가 무지개에 에워싸여 비치는 희귀한 현상이니, 뜻밖의 선물이다.

길만스 포인트에서 정상까지 한 시간. 고도차는 200m. 나를 지옥으로 끌고 간 악마이자 나를 구원한 천사 이스라엘을 따라 중간 포인트인 스텔라 포인트까지 갔다. 정상 우후루 피크까지는 30분. 하지만 발밑은 눈이고 오른쪽은 낭떠러지였다. 해발 5756m. 그곳에서 멈췄다. 몽유병 환자처럼 발을 헛디디면 영원히 실종이다. 이스라엘도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 5~6일째 거짓말 같은 회복

이틀에 걸친 하산길 33㎞는 치유의 길이다. 인도양 쪽 습한 마랑구 루트는 고산 사막과 무어랜드, 그리고 열대우림이 차례로 나오는 꽃동산이다. 길은 완만하다. 하루를 머문 3700m 호롬보 캠핑장에서의 은하수, 15년마다 한 번씩 잎을 내고 125년 만에 정확하게 죽는 세네시오 킬리만자리, 쏟아지던 소나기…. 조용필은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잖아. 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 둬야지"라고 노래했다. 킬리만자로, 일단 오르면 당신이, 내가, 우리가 산 흔적은 낙인처럼 따라다닐 산이었다.

가는 길 대한항공에서 케냐 나이로비까지 직항 운항. 나이로비에서는 육로 5시간, 비행기로는 50분. 카타르항공을 타면 도하에서 킬리만자로 직항을 갈아탈 수 있다. 탄자니아 현지 입국 비자 50달러.

주의점 아프리카 여행은 말라리아와 황열병 예방약 사전 접종 필수. 킬리만자로는 섣불리 오를 산이 아니다. 기초 체력은 물론 기본적인 고산 등반 장비는 필수다. 이용할 여행사에 장비를 문의할 것.

상품 이번 산행은 G-Adventure라는 글로벌 여행사 상품을 이용했다. 지난 5월 한국에 들어온 G어드벤처는 킬리만자로를 비롯해 세계 각국의 트레킹과 토속 여행 상품을 운영 중이다. 소통을 위한 기본적인 영어는 필수. 전문 산악 가이드가 한 팀(최다 12명)당 3~5명씩 동행한다. 항공료 제외 산행 상품 가격은 미화 1999달러부터. 상품 문의는 G어드벤처 코리아 (02)333-4151, www.gadventures.kr 사파리 상품도 함께 예약할 수 있다.

유용 정보 www.climbmountkilimanjaro.com 킬리만자로 전반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풍부하다. www.tanzaniaparks.com/kili.html 탄자니아 국립공원 공식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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