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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네덜란드인

바람아님 2014. 7. 25. 09:05

(출처-조선일보 2014.07.25 오태진 블로그논설위원실 수석논설위원)


말레이시아 여객기가 격추되고 이틀 뒤 기자들 앞에 선 뤼터 네덜란드 총리를 TV로 보며 의아했다. 
그는 우크라이나 반군이 희생자 시신을 함부로 다루는 것이 "아주 무례한 행동"이며 "역겹다"고 했다. 
국민 193명이 숨진 사건에 대한 충격과 분노의 표현치고는 점잖았다. 희생자에 대한 애도도 없었다. 총리가 여객기 피격 
소식을 듣고 독일 휴가에서 돌아와 공항에서 한 말도 뜻밖이었다. "아름다운 여름날이 최악의 날로 바뀌었다."

▶뉴욕타임스가 참극 후 나흘 네덜란드 분위기를 전했다. 
"아무도 검은 옷을 입지 않는다. TV에서도. 조기(弔旗)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총리는 유가족을 만나지 않고 있다. 국왕의 애도 
연설도 없다. 로테르담 야외 음악축제 '크레이지 섹시 쿨'에 1만여명이 모였다. 여러 도시 주말 축제도 예정대로 열렸다.
" 영국 일간 텔레그라프는 "네덜란드인은 남 앞에서 쉽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재앙에 슬퍼하지 않는 것을 명예로 여긴다"고 했다.
[만물상] 네덜란드인
▶네덜란드는 나치 독일에 점령당해 모진 고난을 겪었다. 1966년 베아트릭스 여왕이 독일인 남편을 맞았다. 
게다가 그는 히틀러 청년단이었다. 반대 시위는 약혼식 날 1000명쯤이 구호를 외치는 데 그쳤다. 
네덜란드는 다양한 문화가 소통하는 길목이어서 '다름'에 관대하다. 힘 합쳐 자연을 극복하며 서로 존중하고 절제하는 문화를 
이뤘다. 서양사학자 주경철은 네덜란드인이 "합리적이고 자유롭고 너그럽다"고 했다. 

▶네덜란드인도 축구장에선 몸가짐이 흐트러진다. 훌리건이 거칠기로 영국과 겨룬다. 
그러니 히딩크가 한국에 와 감탄할밖에. "한국 관중은 쓰레기까지 줍고 간다. 세상에 이런 사람들을 본 적이 있는가." 
네덜란드 소설가 그룬버그가 뉴욕타임스 기고에서 "차분함(sobriety)은 네덜란드인의 정체성"이라고 했다. 
그는 말레이시아기 참사가 스포츠처럼 정체성을 흔들고 집단주의를 부추기지 않을까 걱정했다.

▶희생자 시신 마흔 구가 그제 네덜란드로 돌아왔다. 정부는 '국가 애도의 날'로 선포했고 국왕과 총리가 공군기지에 나가 
맞이했다. 온 나라 교회가 조종(弔鐘)을 울렸고 국민은 1분 묵념했다. 
뒤늦었어도 당연한 국가적 애도이지만 그룬버그는 기고를 이렇게 맺었다. 
"나는 오늘 당신들과 함께 슬퍼하지 않겠다. 내가 애도하는 날 당신이 나와 함께 슬퍼하라고 강요하지도 않겠다." 
이런 글을 당당히 실을 수 있다는 게 놀랍다. 
"세계 어디서 이토록 완전한 자유를 누리겠는가." 데카르트가 17세기 암스테르담에 머물며 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