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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계곡 청류로 여름을 씻는다.. 산청의 강&계곡

바람아님 2014. 8. 9. 09:27
흐르는 강과 계곡에도 품격이 있다. 지리산 천왕봉 자락에서 발원한 중산리계곡과 대원사계곡, 그리고 두 계류가 만나는 덕천강이 바로 그런 곳이다. 남명 조식을 비롯한 조선시대 선비들은 이 청정 계곡과 강에서 탁족을 즐기거나 세심정에 올라 마음을 씻음으로써 한여름의 무더위를 달랬다. 천왕봉에서 내려오는 산바람과 덕천강에서 올라오는 강바람이 만나 심신을 넉넉하게 하는 지리산 자락으로 탁족 여행을 떠나본다.

 

↑ 한여름의 무더위를 식히기 위해 경남 산청의 대원사계곡을 찾은 피서객이 청정 계류가 흐르는 대원사 앞 푸른 소에 발을 담그고 탁족을 즐기고 있다.

↑ 피서객들이 삼장면의 송정숲 앞 덕천강에서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왼쪽). 경호강의 수중보를 통과한 래프팅 보트가 소용돌이를 통과하고 있다(오른쪽).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시인이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고 돌아간 곳은 어느 하늘일까? 경남 산청의 중산리계곡 주차장 한쪽에는 천 시인의 '귀천' 시비가 뭉게구름 흐르는 푸른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 천상병 시인을 사랑하는 시인들이 2002년에 세운 시비는 '귀천'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지리산 천왕봉 자락에서 홀로 '마지막 소풍'을 즐기고 있다.

지리산 자락에는 중산리계곡을 비롯해 내원사계곡, 장당골계곡, 유평계곡, 대원사계곡 등이 용틀임을 하며 저마다 천왕봉을 오른다. 그중에서도 장터목 아래의 산희샘에서 발원한 중산리계곡은 지리산 중간쯤에 위치해 일찍이 지리산 등정의 출발지로 사랑을 받았다. 500여년 전 김종직을 비롯해 김일손, 조식, 이륙 같은 학자들이 중산리에서 천왕봉을 오른 까닭이다.

중산리계곡은 시천천을 거쳐 남강으로 이어지는 덕천강의 발원지답게 계곡미가 빼어나다. 진입이 허용되는 탐방안내소 하류 계곡은 얼음처럼 차가운 계류에서 탁족을 하거나 물놀이를 즐기는 피서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이윽고 해가 지면 계곡 곳곳에 설치된 캠핑촌에서 형형색색의 텐트가 불을 밝혀 동화나라를 연출한다.

선비정신이 사라진 요즘은 날이 더우면 옷을 훌훌 벗고 계곡이나 강에 풍덩 뛰어들면 그만이다. 하지만 예의를 목숨보다 귀하게 여겼던 옛 선비들은 어떻게 피서를 즐겼을까? 지리산 유람록인 '유두류산록'을 남길 정도로 지리산을 사랑한 남명 조식(1501∼1572)은 퇴계 이황에 버금가는 학자로 산청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남명은 중산리계곡과 대원사계곡 물줄기가 만나 강폭을 넓히는 덕산을 세 번이나 답사한 후 서실인 산천재를 짓고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남명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후학들이 세운 덕천서원을 비롯해 남명의 서책 등 유품을 전시한 남명기념관 등이 위치한 덕산의 덕천강변에는 고졸미가 돋보이는 정자 하나가 세워져 있다. 세심정(洗心亭)으로 불리는 이 정자는 남명을 비롯한 선비들이 올라 마음을 정갈하게 했던 곳이다. '세심'은 마음을 씻는다는 뜻. 한갓 범인일지라도 세심정에 오르면 왕버드나무 고목 사이로 흐르는 덕천강의 넉넉한 모습에 절로 마음이 깨끗해진다.

덕산에서 59번 지방도를 타고 덕천강을 거슬러 오르면 삼장면 소재지에서 내원사계곡과 대포숲을 만난다. 대포리 주민들이 운영하는 대포숲은 내원사계곡과 대원사계곡의 계류가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한 유원지로 소나무 등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숲 그늘 속에는 텐트가 즐비하고 시리도록 차가운 덕천강 강심은 강수욕을 즐기거나 다슬기를 잡는 피서객들의 감탄사로 연신 파문을 그린다.

대포숲에서 4㎞를 더 달리면 석남리에 위치한 송정숲의 절경이 기어코 발길을 붙잡는다. 모래톱인 송정숲은 천혜의 캠핑장으로 울창한 송림이 짙은 그늘을 만들어 휴식을 즐기기에 좋다. 송정숲 앞 덕천강의 물길을 막은 보(洑)는 아이들이 물놀이하기에 좋은 천연풀장. 노인정 앞에 뿌리를 내린 느티나무 가지 사이로 보이는 송정숲과 덕천강이 한 폭의 풍경화를 그린다.

송정숲에서 1㎞쯤 떨어진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으면 대원사계곡으로 가는 길이다. 약초의 고장답게 길섶은 한약재로 쓰이는 연분홍색 부용화가 1㎞ 정도 도열한 채 자동차가 달릴 때마다 반갑게 손을 흔든다. 화사하면서도 가녀린 표정의 부용화는 무궁화를 닮았다. 그래서 만주에서 활약하던 독립군들은 무궁화를 닮은 부용화를 보고 나라 잃은 설움을 달랬다고도 한다. 요즘 산청에는 동의보감촌을 비롯해 곳곳에 부용화, 눈처럼 하얀 설악초, 빨간색 칸나, 그리고 분홍색 배롱나무꽃이 활짝 피어 있다.

부용화 꽃길이 끝나면 대원사계곡의 울울창창한 나무터널 속으로 빨려든다. 산허리를 가로지르는 찻길 겸 등산로 아래로 깊은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가 산새소리와 어우러져 눈과 귀를 즐겁게 한다. 집채 크기의 바위에 부딪쳐 하얗게 부서지는 계류는 바라만 보아도 가슴이 확 트일 정도로 청량하다.

유평마을을 비롯해 삼거리마을, 중땀마을, 세재마을 등을 품고 있는 대원사계곡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저술한 유홍준씨가 남한 제일의 탁족처로 꼽은 곳이다. 아름드리 노송이 늠름한 자태로 줄지어 있고, 붉은 기운을 토하는 암반 위로 맑은 계류가 흐르는 대원사계곡은 출입이 허용되는 곳곳이 탁족처이다.

고즈넉한 분위기의 천년고찰 대원사 앞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은 찻집이 하나 있다. 이 찻집의 담장을 살짝 넘으면 대원사계곡의 너럭바위 틈새로 흘러온 옥류가 깊은 소를 이룬다. 시리도록 푸른 소에 발을 담그면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시원한 이곳이야말로 몸과 마음을 씻는다는 세신탕(洗身湯)과 세심탕(洗心湯)이 아닐까.

대원사에서 유평마을까지는 승용차 한 대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은 차도이지만 주변의 돌과 나무가 온통 푸른 이끼로 뒤덮여 싱그럽다. 유평마을은 무제치기폭포를 거쳐 천왕봉을 오르는 등산로 입구. 대원사계곡은 이곳에서 유평계곡으로 이름을 바꿔 지리산을 오른다.

유평계곡 끝자락에 위치한 세재마을은 하늘 아래 첫 동네로 한여름에도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서늘하다. 사과밭에 둘러싸인 세재마을의 민박집이나 음식점 마당에 펴놓은 평상은 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부르는 계절의 교차로 같은 존재. 서늘한 바람이 흐르는 평상에 누워 지리산유람록이라도 펴들면 꿈속에서라도 옛 선비들을 만나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