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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유식의 태평로] 中國 사학자가 정리한 6·25전쟁의 역사

바람아님 2014. 9. 4. 11:01

(출처-조선일보 2014.04.24 최유식 디지털뉴스부장)


최유식 디지털뉴스부장 사진브루스 커밍스 미국 시카고대 석좌교수는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세대에게 익숙한 인물이다. 
그가 쓴 '한국전쟁의 기원'은 당시 필독서로 통했다. 그는 이 책에서 '남침 유도설'을 주장했다. 
6·25전쟁을 앞둔 1949년 여름과 가을에 걸쳐 38선 부근에서 남한의 잦은 도발이 있었고, 
이것이 전쟁 발발의 한 원인이 됐다는 것이다. 
대학 내에서는 '남침 유도설' 정도는 알아야 지식인 축에 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위기까지 있었다.

이런 학설은 북한의 남침 사실을 희석시키는 효과를 발휘했다. 
동족상잔을 부른 끔찍한 전쟁의 책임 소재를 '둘 다 잘못한 것 아니냐'는 식으로 모호하게 만든 것이다.
그랬던 커밍스 교수가 지난해 한 국내 신문 인터뷰에서 "한국전쟁은 남침이다. 나는 남침 유도설을 
말한 적이 없다"고 후퇴했다. 책이 나온 지 30여년 만이었다.

커밍스 교수가 물러설 수밖에 없었던 뒤에는 무명(無名)의 한 중국 역사학자가 있다. 
상하이 화둥(華東)사범대의 선즈화(沈志華) 교수이다. 
선 교수는 1990년대 초부터 옛 소련 정부 문서고를 뒤져 스탈린과 마오쩌둥(毛澤東)의 동의와 지원을 등에 업은 김일성이 
6·25전쟁을 일으켰음을 입증하는 다수의 외교문서를 발굴해 공개했다. 김일성의 집요한 남침 계획 승인 요구를 거절해온 
스탈린이 1950년 1월 돌연 마음을 바꿨고, 그에 따라 중국도 군사 지원에 동의한 사실이 드러났다.

선 교수의 이력은 초라하다.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대학 과정을 건너뛴 상태에서 중국사회과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해 세계사를 전공했다. 
석사를 마친 1982년에는 개혁·개방이 진행 중인 중국 남방으로 달려가 10년 동안 옷 장사 등으로 목돈을 벌었다. 
그가 중·소 관계 연구를 위해 학문 세계로 돌아온 것은 그 뒤였다. 소련 붕괴 직후 러시아로 달려가 정부 문서고에서 
옛 소련의 기밀문서를 대거 사 모았다. 이때 확보한 자료를 토대로 6·25전쟁의 원인에 관한 책을 펴낸 것이 1998년이었다. 
이 책 출판과 함께 6·25전쟁 발발 과정에 관한 연구는 이론(異論)의 여지가 크게 줄었다.

그의 연구는 6·25전쟁을 '미국의 침략 전쟁'으로 규정해온 중국 당국에도 영향을 미쳤다.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자매지인 환구시보(環球時報) 영문판은 2010년 선 교수를 인터뷰하고, 그의 6·25전쟁 연구 내용을 
1개 면에 걸쳐 자세히 소개했다. 중국 고교 역사 교과서의 기술도 조금씩이지만 중립적인 방향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이런 흐름이 전혀 통하지 않고 있다. 검정을 통과한 고교 한국사 교과서의 상당수가 커밍스 교수의 
낡은 이론을 버젓이 기술하고, 우리 아이들은 그런 교과서를 들고 공부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고 있다.

정전 61년이 지난 지금 과거 총을 맞댄 한국과 중국은 경제 협력 파트너가 됐다. 
지난달에는 파주에 묻혀 있던 '중공군' 유해 437구가 북한을 경유하지 않고 곧바로 중국으로 송환됐다. 
중국 학계도 이념의 시각에서 벗어나 6·25전쟁을 객관적으로 연구하는 추세가 정착돼가고 있다. 
그런데도 국내 일부 역사학자들은 여전히 1980년대의 낡은 이념 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의 미망(迷妄)이 안쓰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