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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균 칼럼] 시오노 나나미의 '절호의 찬스'

바람아님 2014. 9. 18. 10:43

박보균/대기자

 

시오노 나나미(鹽野七生·77)는 자극이다. 그 감정은 극단을 오간다. 그는 『로마인 이야기』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를 썼다. 그 작품들은 매력이다. 시오노는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 썼다. 그 글은 혐오다. 일본 잡지 문예춘추(10월호) 기고문이다.

 글 제목은 ‘아사히신문의 고백을 넘어서’다. ‘고백’은 요시다 세이지(吉田淸治·1913~2000)의 자서전 논란이다. 요시다는 “군 명령에 따라 제주도에서 위안부를 강제로 끌고 갔다”고 주장했다. 아사히는 요시다 관련 기사(1980~90년대)를 오보로 판단했다. 그리고 취소, 사과했다.


 시오노는 “유럽과 미국인들도 위안부 문제에 큰 관심을 갖게 됐으며 이런 변화는 수술이 불가피하다”고 했다. 기고문은 이렇게 단언한다. “인간은 부끄럽거나 나쁜 일을 했다고 느끼는 경우에 강제적으로 어쩔 수 없이 했다고 강조하는 성향이 있다. 반복해서 입에 올리다 보면 스스로 믿게 된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진술은 자기최면이라는 것이다. 그 판단은 위안부를 강제연행하지 않았다는 확신과 연결된다. 시오노 저서들은 역사와 인간에 대한 통찰을 추적한다. 그는 그 경험을 위안부 문제에 적용했다. 그 시도는 실패한다.

 위안부 증언의 본격적인 시점은 1990년대 초·중반이다. 위안부 할머니가 될 무렵부터다. 젊은 시절 할머니들은 과거의 상처를 숨겼다. 가족과 어른, 한국의 사회 정서 때문이다. 하지만 할머니의 연륜은 내면을 달라지게 했다. 분노가 꿈틀거린다. 부끄러움은 뒤로 밀려났다. 분노는 용기를 낳는다. 폭로는 강제연행 당한 악몽의 탈출구다. 그 감정들은 인간성의 본질이다. 시오노는 연륜의 힘과 미묘함을 경시했다. 그의 인식은 편향과 오만이다.

 시오노 기고문에 긴급 제안이 있다. “네덜란드 여자도 위안부로 삼았다는 이야기(아사히 보도)가 퍼지면 큰일이다. 그 전에 급히 손을 쓸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 이야기는 자바섬 스마랑 사건이다. 1942년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은 인도네시아를 점령했다. 그곳은 네덜란드 식민지다. 일본군은 그 지역 네덜란드 여성들도 위안부로 동원했다.

 시오노의 조언은 늦었다. 네덜란드 하원은 “일본은 고노담화에 상충하는 발언을 하지 말 것”을 결의했다(2011년). 그 이야기는 유럽에서 퍼지고 있다. 네덜란드 시민단체(일본명예 부채재단)는 확산에 앞장선다.

 기고문은 “아사히 고백은 대처하기에 따라 절호의 찬스로 바뀔 수 있다. …특히 미국의 공기 흐름을 바꿀 호기로 삼을 수 있을지는 국정담당자, 언론을 비롯한 일본인 전체가 고름을 짜낼 용기가 있는지에 달렸다”고 했다. 시오노가 심취한 마키아벨리가 떠오른다. 마키아벨리의 주요 언어는 기회와 결단이다.

 절호의 찬스에는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요시다 발언의 영향력이 압도적이었어야 한다. 그것은 양심선언으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한국사회의 관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어진 폭로 때문이다. 할머니들의 육성 진술은 위력적이다. 요시다의 증언보다 결정적이었다. 아사히 오보 소동의 파장은 제한적이다. 요시다 증언이 빠져도 사실은 굳건하다. ‘강제 동원’의 진실은 헝클어지지 않는다. 절호의 조건은 충족되지 못한다. 고름을 짜낼 용기도 작동하기 힘들다.

 “신중과 인간미를 갖고 절제된 방식으로 진행해, 지나친 확신이 부주의하게 만들거나.”-마키아벨리의 『군주』(17장) 구절이다. 지나친 확신은 지적 탐욕을 낳는다. 시오노가 포착한 ‘절호의 기회’는 무산될 수 밖에 없다. 위안부 강제동원 사실은 다양하고 풍부하다. 가와다 후미코(川田文子)의 『빨간 기와집』(1987년 간행)도 있다. 그 책은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배봉기 할머니의 이야기다.

 아베 신조 총리는 아사히 사태를 활용한다. 우익 세력은 고노담화(1993.8)의 변경을 노린다. 하지만 고노담화는 요시다 진술을 반영하지 않았다.

 위안부 문제는 기억과 기록의 전쟁이다. 기억은 기록으로 전파, 보존된다. 한국은 기록정신에서 일본에 밀린다. 할머니들 구술은 나름의 짜임새를 갖고 있다. 그 완성도는 확장해야 한다.

 기록 전쟁은 세밀함을 요구한다. 그 전선에서 비분(悲憤)이 우선돼선 안 된다. 정치는 뒤로 물러서야 하다. 정치와 역사가 묶여 있으면 강개(慷慨)가 두드러진다. 사실과 진실의 추적과 축적 열정은 떨어진다. 아베 총리의 과거사 폭주는 멈추지 않는다. 그 대처는 강온을 겸비해야 한다. 정치와 역사, 정치와 문화는 나눠져야 한다. 그것이 혐한(嫌韓)세력의 확대를 막는다. 한류파의 재기를 도모한다. 역사전쟁은 열정과 세련미를 요구한다.

박보균 대기자

 

[시오노 나나미에 대한 또다른 "게릴라칼럼"]

'망언' 시오노 나나미... 이 정도로 '꼴통'이었나?

 

'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로 유명한 일본 작가 시오노 나나미의 '일본군 위안부(일본군 성노예)' 발언이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그는 일본의 보수성향 월간지인 <문예춘추> 10월호에 보낸 기고문에서 "네덜란드 여자들까지 위안부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퍼지면 큰일"이라며 "그 전에 급히 손을 쓸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급히 손을 써야 한다'는 말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과와 배상을 서둘러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위안부를 강제 동원했다는 사실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 

시오노는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을 인정하는 기사를 내보낸 <아사히 신문> 관계자는 물론, 위안부 동원에 대한 일본의 국가적 개입을 인정한 1993년 고노 담화의 주역들을 상대로도 청문회를 통해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에서 드러나듯이, 네덜란드 위안부 문제가 확산되기 전에 서둘러 은폐해야 한다는 것이 시오노의 발상이다.

시오노가 말한 네덜란드 위안부 문제는 '스마랑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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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군 위안소의 풍경.
ⓒ 위키피디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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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노가 말한 네덜란드 위안부 문제는 1944년 스마랑 사건을 가리킨다. 이 사건은 일본이 미국·영국 등을 상대로 동남아·태평양 지역에서 태평양전쟁(대동아전쟁, 1941~1945년)을 벌이는 중에 발생했다.

일본군은 인도네시아에서 납치한 17~28세의 네덜란드 여성 35명을 위안부로 전락시킨 뒤, 인도네시아 자바섬에 있는 스마랑 근처의 위안소에서 이들을 강간했다. 일본은 이 행위를 매춘이라고 강변했지만, 강제로 끌려온 여성들이 과연 자유의사에 따라 매춘을 할 수 있었을까.

16세기 이래로 네덜란드는 후추 무역을 목적으로 인도네시아를 포함한 동남아시아에서 착취 활동을 전개했다. 이 때문에 네덜란드 사람들이 인도네시아 등지에 진출하게 되었다. <하멜 표류기>의 주인공인 네덜란드인 하멜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본사가 있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동아시아 무역 전담 기구)에 취직한 뒤, 1653년에 일본 나가사키로 가다가 폭풍을 만나 제주 해안에 표착했다.

이처럼 16세기 이래로 네덜란드인들이 동남아에 거주했기 때문에, 태평양전쟁 중에 일본이 이곳에서 네덜란드 여성들을 강제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은 처음에는 동아시아 여성들을 인도네시아 위안소에 배치했다. 그러다가 다급해지자 네덜란드인들까지 강제 동원하게 된 것이다.

1945년에 일본이 패전한 뒤에 스마랑 사건은 인도네시아 바타비아에서 열린 국제전범재판에 회부됐고, 일본군 장교 일곱 명과 군속 네 명이 1948년에 유죄판결을 받았다. 책임자인 오카다 게이지 육군 소좌(소령)는 사형을 받았다. 일본 정부는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세계 49개 나라와 일본 간의 제2차 세계대전 강화조약)에서 전범재판의 판결을 수용했다.

이것은 일본 공권력이 위안부를 강제 동원했음을 공식적으로 시인한 것이었다. 또 여성들이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됐다는 일본측 주장이 거짓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고노 담화를 허물어뜨리려는 아베 신조 총리의 행보에 제동을 걸기에 충분한 것이다.

일본사회가 무언가에 쫓기고 있다는 증거

시오노 나나미 같은 일본 우파 지식인들은 아시아 여성뿐 아니라 유럽 여성까지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 동원됐다는 게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면, 반일 연대가 동아시아 차원이 아니라 세계적 차원으로 확대될지 모른다는 우려를 갖고 있다. 그래서 시오노 같은 지식인이 역사 작가의 자세를 스스로 허물면서까지 진실의 은폐를 촉구하고 나선 것이다.

이는 그만큼 일본 사회가 무언가에 쫓기고 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또 동아시아들의 사과 및 배상 요구는 아랑곳 않으면서 서양 국가들 앞에서는 벌벌 기는 일본인들의 심리 구조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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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전 직후에 영국군 장교와 인터뷰하는 중국인 출신 위안부.
ⓒ 위키피디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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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부는 스마랑 사건 외에는 위안부 강제동원의 사례가 없다고 강변하지만, 이것은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 말이다. 상대적으로 더 부담스러운 유럽 여성들은 강제로 동원하고, 덜 부담스러운 동아시아 여성들은 본인의 의사에 따라 동원했다는 게 말이 되는가. 일본의 점령 하에 있지 않은 네덜란드 여성들은 강제 동원하면서, 일본의 점령 하에 있는 한국·대만·인도네시아 등지의 여성들은 강제 동원하지 않았다는 게 과연 이치에 맞을까?

상식 수준의 문제점을 제시하지 않더라도, 일본의 국가권력이 개입했다는 점은 여기저기서 드러난다. 일례로, 2012년 일본 방위청 사료실에서 발견되어 국내에 소개된 1942년 6월 13일자 일본 육군성 비밀문서에는, 육군성이 대만 주둔 일본군의 요청에 따라 70명의 위안부를 보르네오 섬에 파견하는 내용이 나온다. 여성들을 선발하고 동원하고 수송하는 과정에 일본군이 조직적으로 개입했음을 이로부터 알 수 있다.

일본은 여성들이 돈을 벌 목적으로 위안부 징발에 자발적으로 호응했다고 강변하지만, 그 자발성의 실상은 위안부 출신 여성들의 증언에서 잘 드러난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을 담아서 엮은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4: 기억으로 다시 쓰는 역사>에 실린 고 김영자 할머니(2005년 작고)의 증언을 들어보자. 이 증언에서 우리는 위안부로 강제 동원될 때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이해의 편의를 위해 김영자 할머니의 증언을 서울말로 바꾸고 어법에 맞게 수정했음을 밝힌다. 

"그날 우리 아버지를 순경이 막 때렸어. 내놓으라고 말이야. 난 숨었지. 안 가려고. 그랬더니 (나를) 내놓으라고 (아버지) 코에다가 주전자로 물 넣고. …… 일본 군인들, 순경들이 집집마다 다니면서 처녀들을 조사하고 간 거지. 돈 보내준다고 데리고 가서는 ……. 돈은 무슨 돈."

이 증언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돈 줄 테니 가자"면서 강제로 여성들을 끌고 가놓고는 "여성들이 돈을 벌 목적으로 자발적으로 지원했다"고 억지주장을 하는 것이 일본 정부의 태도다.

국가 침공 전 위안부 설치 위해 사전 조사 나선 일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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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안소 입구의 광고 문구. 오른쪽에는 “성전 대업의 용사들 대환영”이라고 쓰여 있고, 왼쪽에는 “심신을 받들 일본 여성들의 서비스”라고 쓰여 있다.
ⓒ 위키피디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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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강제성만큼 주목을 끄는 것은, 일본이 전쟁 준비 못지않게 위안부 준비에까지 심혈을 기울였다는 점이다. 특정 국가를 침공하기 전에 그 나라에 위안부를 배치할 준비까지 사전에 마쳤다는 점이다.

일례로, 일본 육군성 의사과에 근무했던 긴바라 세츠오의 일지인 <육군성 업무일지 적록>에 따르면, 일본은 일본군이 인도네시아에 들어가기도 전에 후카다 마스오 소좌를 비밀리에 파견해서 위안부 설치에 필요한 사전 조사를 하도록 했다. 인도네시아에서 돌아온 뒤인 1941년 7월 후카다 소좌는 현지 촌장들에게 위안부 징발을 할당하자고 육군성에 제안했다.

태국에서도 동일한 사례가 발견된다. 일본군은 태평양 전쟁 발발 직후인 1942년 1월에 태국인 여성들을 모아 위안소를 설치했다. 이걸 보면 전쟁 발발 이전에 이미 상당한 준비를 해놓았음을 알 수 있다. 총알 확보 못지않게 위안부 확보에도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이처럼 일본은 전쟁 못지않게 위안부 동원에도 핏대를 세웠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일본은 태평양 전쟁과 더불어 여성들을 상대로 해서는 안될 짓까지 서슴지 않고 저질렀다. 이처럼 용서받기 힘든 부끄러운 일을 저질렀으니, 시오노 나나미 같은 일부 지식인들이 그것을 솔직히 인정하기보다는 차라리 숨기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한 게 아닐까.

너무도 뻔한 잘못을 감추려 하는 일본 일부 지식인들의 태도를 보면서, 일본이라는 나라도 바닥을 향해 가고 있구나라는 느낌이 들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우박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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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인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 일본에서 1992년부터 출간된 로마제국 흥망사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69)가 15년 간 로마제국으로의 여정을 끝내고 2006년 12월 16일 도쿄 상공회의소 회의실에서 한국 기자들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