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만물상] 대리기사

바람아님 2014. 9. 27. 09:07

(출처-조선일보 2014.09.27 김광일 논설위원실)


대리기사는 네온사인이 물드는 저녁 무렵 일터로 나선다. 퇴근은 한강에 물안개가 피어나는 새벽녘이다. 
그에겐 '스피드가 돈'이다. 하얗게 새우는 밤보다 애환이 먼저 쌓인다. 목적지에 다 온 승객이 자기 집을 못 찾아 헤맨다. 
때론 술에 절어 쓰러져 있다. 할 수 없이 지갑을 뒤져 주소를 찾는다. 도둑으로 오해도 받는다. 
휴대전화에서 집 전화를 알아낼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아무리 깨워도 꿈쩍 않던 손님이 아내가 와서 고함치면 
벌떡 일어난다.

▶1980년대 초반 경찰에 음주 측정기가 널리 퍼지면서 대리운전도 자리를 잡았다. 신문이 새로운 현상을 다뤘다. 
'마음 놓고 술 드세요' '대리운전 성업 중' '고급 술집, 대리기사 내세운 새 상술(商術)'…. 요금은 1만5000~3만원 선불이었다.
지금이나 별반 다름없다. 근래 시장이 급격히 커졌다. 요즘엔 시장 규모가 한 해 4조원대라는 말도 나돈다. 
사업장 3000곳에, 종사자가 20만이 넘고, 하루 고객이 70만 가까운 호시절도 있었다.

[만물상] 대리기사
▶일본은 70년대 중반부터 사업 형태로 대리운전이 생겼다. 
미국엔 음주 일행에서 한 명은 술을 못 먹게 하는 '지명 운전자 프로그램'을 다들 따랐다. 
술집 주인이 고객의 운전 불능을 판정하는 '팁시 프로그램', 연말연시에만 공짜로 태워다주는 '소버 캡'도 선보였다. 
뉴욕 어느 회사는 가입비 45달러에 대리운전 한 차례마다 38달러를 받았다. 
운전대 맡겨본 한국인들은 "대리운전비 빼고는 모든 게 미국이 한국보다 싸다"고들 했다.

▶야당 의원과 세월호 유족이 연루된 대리기사 폭행 사건은 우리 사회의 단면을 예리한 칼로 도려내듯 들춰냈다. 
사단은 서울 여의도에서 벌어졌다. 돈이 몰리고 정객이 북적대는 곳이다. 
대리기사 이모씨는 사업에 실패한 50대 가장이다. 삶의 벼랑 끝을 구경한 사람이다. 
그 달고 쓴 맛을 다 봤기에 물러설 수 없는 선(線)도 생겼다. 
상대가 준 명함을 들고 "국회의원이 뭔데?" 하고 묻는, 인간 존엄의 저항선을 가진 남자다.

▶대리기사가 하루 10시간 일해도 손에 쥐는 건 4인 가구 최저생계비를 밑돈다. 
사업장에 20% 떼주고도 보험료, 알선 콜센터에 내는 '콜비(費)'까지 스스로 감당한다. 
호출에 1분이라도 늦어 승객이 그냥 떠나도 콜비 3000원을 내야 한다. 
승객이 콜센터에 항의하면 무조건 벌칙을 감수한다. 
말썽이 커지면 일터를 잃는다. 
4대 보험 혜택도 없다. 
대리운전자와 고객을 함께 보호할 법안이 상임위에 올라와 있지만 국회는 딴 데 정신이 팔려 있다. 
퇴근길 새벽달이 더 서글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