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國際·東北亞

찬킹청의 중국정치 뚫어보기⑤ 마오쩌둥 추모 열기의 이면

바람아님 2014. 11. 17. 18:58

(출처-조선일보 2013.12.30 찬킹청, 홍콩 신보 총편집인)


올해 12월 26일은 중국 전 국가주석 마오쩌둥(毛澤東)의 탄생 120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를 맞이해 정부는 대규모 기념행사를 여럿 기획했으나 이러한 추모 열기가 중국의 ‘좌향좌’를 의미한다는 
외부의 오해를 사면서 기념행사 대신 문화예술 행사를 열어 정치색을 빼기 위해 노력했다.

12월 17일 필자가 근무하고 있는 홍콩의 언론인 ‘신보(信報)’가 ‘마오쩌둥 전집 전 52권, 세계 최초 한정 출판’이라는 내용의 
지면 광고를 실었다. 필자의 동료가 이 전집의 편집자와 잘 아는 사이인데 듣자하니 편집자가 20년 동안 국내외에서 
마오쩌둥이 태어난 1893년부터 세상을 뜬 1976년까지의 모든 글을 수집하여 이 전집에 수록했다고 한다. 이 전집에는 
마오쩌둥이 쓴 글 중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가장 최초의 글부터 그의 생애 마지막으로 보낸 전보까지 마오의 모든 글이 
들어 있어, 가장 완전한 마오쩌둥 전집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필자는 요즘 같은 세상에 과연 마오쩌둥의 전집을 읽을 사람이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1972년 2월 리처드 닉슨(사진 오른쪽) 미국 대통령이 중국에서 마오쩌둥(毛澤東) 국가주석을 만나 악수를 하고 있다.
1972년 2월 리처드 닉슨(사진 오른쪽) 미국 대통령이 중국에서 마오쩌둥(毛澤東) 국가주석을 만나 악수를 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의 선전 구호에 따르면 마오쩌둥은 중국 공산당, 중국인민해방군 및 중화인민공화국의 위대한 지도자이다. 
하지만 많은 중국 국민들과 해외의 화교들에게 있어 마오는 독재자이자 폭군이다. 또 마오가 주도한 수많은 정치운동은 
중국을 붕괴의 위험으로 몰아넣었다. 1976년 마오가 세상을 뜨고 그를 추종하던 극좌파인 ‘사인방(四人幫)’이 무너지면서 
공산당 지도자들은 마오의 계급투쟁과 평균주의 노선을 포기했다. 소위 ‘마오쩌둥 사상’은 사실 중국 공산당의 이론과 
이데올로기에 국한된 학설에 불과하게 되었으며 정책적 영향력을 잃었다.

중국 국민들은 날선 비판을 멈추지 않았으며, 공산당 내부에서 마오쩌둥 사상을 버려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그러나 개혁개방의 선구자인 덩샤오핑(鄧小平)은 마오를 비판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공산당에 마오쩌둥 사상을 수호하길 
호소했다. 덩샤오핑 문집에도 ‘마오쩌둥 사상은 버릴 수 없는 것으로 이 사상을 포기하는 것은 우리 당의 빛나는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다’고 기록되어 있다. 
중국 공산당 제11차 삼중전회 개막일이자 개혁개방 노선 도입의 전날인 1978년 12월 13일, 덩샤오핑은 중앙공작회의 
폐막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마오쩌둥 사상은 영원히 우리 당과 군, 각 민족의 가장 소중한 정신적 자산이다.’

35년간 마오쩌둥을 비판해왔으면서도 중국인이 계속해서 마오를 추종하고 천안문 광장에 여전히 마오의 초상화가 커다랗게 
걸려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마오가 대표하는 것은 도대체 어떤 사상인가? 근대 중국에서 마오는 어떻게 이렇게 확고부동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일까? 중국을 이해하고 중국의 미래를 분석하기 위해서 마오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마오쩌둥 추모행사에 참석해 참배하고 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마오쩌둥 추모행사에 참석해 참배하고 있다.
마오쩌둥이 어떻게 당내 투쟁을 평정하고 최고의 권위자가 되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는 가오화(高華)의 저서인 
‘붉은 태양은 어떻게 떠올랐나(紅太陽是怎樣升起的)’가 필독서로 꼽힌다. 이 책은 주관주의·종파주의·형식주의를 바로잡기 
위한 ‘옌안정풍운동(延安整風運動)’을 통해 마오가 공산당 내부에서 최고 정신적 지도자의 이미지를 형성한 과정을 서술했다.

이 책을 통해 마오가 자신의 정적을 하나씩 제거하면서 소련의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중국의 현실에 기초해 ‘중국화’ 한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 
당시 코민테른을 대표해 중국공산당 주류파로 자리 잡고 있던 유소파(留蘇派·소련 지향적 공산주의자)는 소련의 정통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계승했다. 반면 마오는 당시 중국의 ‘반(半)봉건·반(半)식민지’와 같은 국가적 현실을 이해하고 있었으며
도시의 노동운동을 중시하는 코민테른과는 달리 농촌을 근거지로 한 농민운동을 중시했다. 마오는 이에 기초해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중국의 현실과 결부시켜 마오쩌둥 사상을 만들었는데, 이 마오쩌둥 사상에 의해 유소파가 밀려나게 되었다.

마오쩌둥부터 덩샤오핑까지 중국이 겪은 혁명은 모두 서양의 이론을 중국식으로 받아들여 성과를 거둔 혁명이다. 
덩샤오핑은 대외개방 정책을 통해 서양의 기술과 행정, 교육, 사회제도의 방식을 받아들이면서 중국을 현대화로 이끈 반면, 
마오쩌둥의 이론은 국가를 현대화하지 못했고 빈곤과 낙후된 상황을 개선하지도 못했다. 이러한 차이가 존재하지만, 
마오쩌둥과 덩샤오핑 모두 개혁의 과정에서 서양의 것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중국의 현실에 기초해 바꾸는 소위 
‘중국화’를 거친 후에 적용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중국화’의 주요 내용으로 ‘평등’과 ‘균등한 부의 분배’를 꼽을 수 있다. 
공자의 불환빈이환불균(不患貧而患不均·가난함을 근심하지 않고 고르지 않음을 근심함), 
묵자의 분재불감불균(分財不敢不均·부의 분배는 균등하게 이루어져야 함)을 비롯하여 중국 혁명의 아버지 쑨원(孫文)이 
‘중국국민당개진선언(中國國民黨改進宣言)’에서 밝힌 ‘부유해지고 균등해지지 않는다면 투쟁을 면하기 어렵다’는 
말은 모두 부의 균등한 분배를 강조하고 있다. 중국의 개혁개방은 일부 사람을 먼저 부유하게 하였으나 이것이 초래한 
사회의 불평등 현상과 빈부격차는 점점 심각해지고 있어 결국 많은 국민이 개혁개방의 목적 자체에 의문을 품는 결과를 
낳았다. 국가가 부유해진 후 그 많은 부는 모두 누구에게 돌아간 것일까? 
공산당은 도대체 누구의 이익을 대표하고 있는가?

마오쩌둥 사상의 부활에 대해 말로는 마오를 추모하는 것이라 하지만 사실은 빈부격차와 사회 불평등을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제도를 찾지 못하여 마오가 강조한 ‘균등한 부의 분배’를 다시 떠올린 것으로, 이는 중국에 새로운 ‘계급’이 등장하는 
현상에 대한 강력한 불만의 목소리이다. 시진핑(習近平) 현 국가주석이 여러 차례 마오를 ‘숭배’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지만 
사실 이는 중국 국민이 품은 불만에 대한 대응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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