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時流談論

[문갑식의 세상읽기] 세월號(호) 이어 통영艦(함)까지 침몰시킬 것인가

바람아님 2014. 11. 25. 10:46

(출처-조선일보 2014.11.25 문갑식 선임기자)


포츠머스는 영국 남서부의 항구다. 위치가 우리나라 경상남도 진해와 비슷하다. 

포츠머스는 영국 해군의 모항(母港)이다. 1194년 리처드 1세가 건설했고 1496년에 왕립(王立) 조선소가 들어섰다. 

넓이가 120㏊나 된다.

300년 넘은 벽돌 건물이 수두룩한 포츠머스에 가장 중요한 유산이 두 개 있다. 

HMS빅토리함(艦)과 트라팔가르 해전(海戰) 기념관이다. 

빅토리함은 1805년 10월 21일 벌어진 트라팔가르 해전 때 허레이쇼 넬슨 제독이 탔던 기함(旗艦)이다.

이 해전은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전사자를 낸 것으로 유명하다. 

영국 함대 27척과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 33척이 맞붙었다. 

침몰 함정 수는 0대22의 영국 해군 압승이었는데 사망자 수가 영국 1700명, 연합군이 5000여명이나 됐다.

트라팔가르 해전 기념관의 시계는 오후 3시 13분에 멈춰 있다.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생을 마쳤듯 넬슨도 그 시각 트라팔가르 바다에서 삶에 종장을 찍었다. 

이때 흘린 피가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왕국'으로 만든 거름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몰락했지만 영국 해군은 여전히 세계 3~5위로 평가된다. 

미국 없이 유럽에서 러시아 해군과 맞설 유일한 나라가 영국 해군이다. 

그 영광(榮光)의 기저에 숱한 오류와 비극이 있었음을 아는 이는 드물다.

1731년 영국 선장 로버트 젱킨스가 서인도제도에서 돌아왔다. 귀가 잘린 채였다. 

스페인 장교는 밀무역을 했다고 형벌을 가하며 이죽거렸다. 

"너희 잉글랜드 왕에게 가서 이런 짓을 하면 그의 귀도 베겠다고 꼭 전해라." 

7년 뒤 젠킨스는 잘린 귀를 담은 단지를 의회로 들고 와 복수를 호소했다. 

"내 영혼은 신(神)에게, 이익은 국가에 바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1739년 10월 23일 영국의 선전포고로 시작된 게 '젱킨스의 귀 전쟁'이다.


문갑식 선임기자 사진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이때 조지 앤슨 제독 함대가 남미와 필리핀을 돌며 역사에 희귀한 '세계 일주 전쟁'을 벌였다. 
1744년 앤슨이 개선했을 때 1955명이던 병사는 600명으로 줄어 있었다. 
전사자는 4명뿐, 전부 괴혈병으로 숨진 것이었다. 
영국 해군성은 사과·식초·보리차 등으로 실험을 해보다 1795년 "모든 해군 함선에 레몬주스를 선적하라"는 규정을 만들었다. 
괴혈병에 특효인 비타민C 보강에 레몬만 한 게 없었다.

그래도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1792년부터 1815년까지 23년간 영국 해군의 사망자는 10만3660명이었다. 
그중 전사자는 6.3%에 불과했다. 
함정 파손과 화재로 숨진 병사가 12.2%였고, 81.5%인 8만4440명은 여전히 이런저런 질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1707년 10월에는 해군 2000명이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물귀신이 된 적도 있다. 
영국 함대 4척이 방향을 잃고 헤매다 포츠머스 대신 실리제도(諸島)에서 침몰했던 것이다. 
잘못된 경도(經度) 측정이 원인으로 밝혀졌다.

우리 같으면 총리부터 해군 장교까지 목을 줄줄이 잘라 화풀이했겠지만 영국은 7년 뒤 '경도법'을 제정하는 것으로 해결했다. 
법의 골자는 정확한 경도 측정법 개발자에게 지금의 100만파운드쯤 되는 거금을 준다는 것이었다. 
첫 상금은 목수(木手) 존 해리슨에게 돌아갔다. 1735년 그가 만든 크로노미터는 34㎏이었다. 
그는 24년 걸려 이것을 지름 13㎝짜리 회중시계만큼 줄여냈다. 
발전은 한풀이로 이뤄지는 게 아님을 보여주는 사례다.

'세월호 사태'로 인한 불똥이 '통영함 비리'로 튀더니 건국 이래 최대의 방산(防産) 비리 수사로 번지고 있다. 
나는 통영함이 대단한 신통력을 지닌 함정인데 임무를 소홀히 한 줄로만 알았다. 
알고 보니 사실은 이런 것이었다.

첫째, 통영함은 지금 대우조선 옥포조선소에 계류돼 있다. '호적상 주인'은 해군이 아니라 방위사업청이다. 
둘째, 선체고정음파탐지기(HMS)와 수중무인탐사기(ROV)가 1970년대 것이란 주장은 거짓이다. 
셋째, "통영함에 HMS와 ROV 대신 올 4월쯤 어군(魚群)탐지기를 해군 몰래 단 것은 무기중개상이었다"고 해군은 밝혔다. 
넷째, 방사청의 일부 장교가 이걸 묵인했다. 
다섯째, 해군은 이 사실을 6~7월쯤 안 뒤 통영함 인수를 거절했다.

이런 것을 감안하면 수사는 무기중개상과 결탁한 장교, 감시시스템을 못 만든 방사청을 겨눠야 하는데 애꿎은 통영함만 
비판받고 있다. 이 황당 스토리를 잉태한 것이 매사에 '구세주의 강림(降臨)' '요행'만 바라는 우리다. 
언론과 국회가 "통영함이 투입됐다면 전부 구조됐을 것"이라는 희망을 부풀리자 통영함은 구세주, 그것도 국민을 외면한 
'나쁜 구세주'가 됐다. 애초 세월호 사태 때도 우리는 청해진해운보다 정부 비판에 더 열을 올렸다.

통영함은 애초 구조에 나설 수 없는 수준이었고, 해군의 '투입 중지' 판단도 냉정한 것이었다. 
훈련이 제대로 안 됐고, 해군 것도 아니었으며, 사고 위험마저 높았다. 
적어도 상(賞)은 못 줄지언정 비난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이런 걸 주객전도(主客顚倒)라고 한다. 
세월호에 이어 통영함마저 침몰시켜야 직성이 풀릴까. 
왜 우리는 사고에서 발전의 전기(轉機)를 찾는 대신 
있는 것마저 한(恨)을 푸는 푸닥거리의 대상으로 몰아버리는지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