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時流談論

[삶의 향기] 그대의 찬 손

바람아님 2014. 12. 2. 11:16

[출처 ; 중앙일보 2012-12-2일자]

민은기/서울대 교수·음악학

 

 

파리의 한 낡은 아파트 옥탑방. 젊은 예술가 지망생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이들의 월세는 벌써 몇 달씩 밀려 있고, 추운 겨울인데도 땔감 하나 없어 집안은 싸늘하기만 하다. 견디다 못한 젊은 시인 로돌포는 자기가 쓴 드라마 원고를 난로에 태우면서 몸을 녹인다. 이때 이웃에 사는 미미가 찾아온다. 미미는 실수로 어두운 구석에 열쇠를 떨어뜨리고, 그것을 찾아 주려던 로돌포가 우연히 그녀의 손을 잡게 된다. 이 순간 로돌프가 미미를 향해 부르는 아리아가 바로 ‘그대의 찬 손’이다. 가진 것도 없고 미래도 불확실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마법처럼 그렇게 시작된다. 오페라 ‘라보엠’ 이야기다.

 오페라 속에서는 젊은이들의 가난조차 낭만이고 이들이 겪는 고통은 그때마다 아름다운 아리아로 승화된다. 하지만 현실은 낭만과는 거리가 멀다. 당장 먹고살 일이 막막한 젊은이들에게 사랑이나 결혼은 이미 사치가 된 지 오래다. 유례없는 취업대란, 청년실업으로 젊은이들의 삶은 팍팍하기 그지없다. 싱글세 얘기에 젊은이들이 분노하는 것도 당연하다. 결혼이고 출산이고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것이 아닌데 세금까지 물리겠다니. 우는 아이 뺨 때리는 격이라고나 할까. 그래도 어딘가 지원이라도 해볼 수 있는 청년들은 예술가 지망생들보다는 처지가 훨씬 낫다. 예술계 학생들은 졸업을 해도 오라는 데도 없고 딱히 갈 곳도 없다. 백수라고 해야 할까 자유인이라고 해야 할까.

 예나 지금이나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가난하다. 그런데도 예술가 지망생들이 꾸준히 나타나니 이것도 불가사의한 일이기는 하다. 그러다 보니 사회적으로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데 관심이 생길 리 없다. 고생인 줄 알면서도 본인이 스스로 선택한 길이 아닌가. 그중에서 살아남는 자가 진짜 예술가가 아닌가. 한마디로 훌륭한 작품은 잘 팔리기 마련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지만 좋은 작품이라고 다 잘 팔리는 것이 아니고, 또 잘 팔린다고 해서 다 좋은 작품은 아니다. 예술가가 어떻게 하면 잘 팔릴 작품을 만들까 고민하기 시작할 때, 그의 작품은 예술이 아니라 상품이 된다. 만약 모차르트가 끝까지 잘 팔릴 작품들만 작곡했다면 우리는 말년의 그의 위대한 명곡들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빚에 쪼들리면서도 인기 대신 가난을 선택한 덕분에 우리의 영혼이 얼마나 풍성해졌는가.

 그런 점에서 우리는 과거의 가난했던 예술가들에게 일종의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그런 예술가들을 돕기 위해 2년 전 예술인 복지법이 통과되었다. 이른바 최고은법이다. 그러나 법 제정 이후에도 예술가들에게 현실은 여전히 신산하기만 하다. 당장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고통은 매일 이들의 어깨를 짓누른다. 지난주 서울시청에서 열린 국제 심포지엄에서도 젊은 예술가들은 하나같이 사회 안전망 밖에 사는 삶의 고단함을 토로한 바 있다. 때로 이들은 힘든 현실을 견디다 못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지난해에 듀크의 김지훈이 세상을 떠났고, 올해는 배우 우봉식이다. 그나마 이름이 알려진 이들의 죽음에는 애도라도 표할 수 있지만 소리 없이 사라진 예술가들에게는 그마저 허용되지 않는다.

 이들의 찬 손을 따뜻하게 잡아줄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가뜩이나 먹고살기도 힘든데 예술이라니 사치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 터이다. 먹고사는 일은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니까. 그러나 먹고사는 것이 전부라고 하기에는 우리네 인생이 너무 아쉽다. 문화와 예술을 뒷전으로 밀어둔 결과 우리 아이들은 어느새 세계에서 가장 불행한 아이들이 되어 버렸다. 영어와 수학에만 올인하면서 정작 아이들을 위한 가치와 문화는 외면해버린 때문 아닌가. 따지고 보면 불행한 것이 어디 아이들뿐일까. 청년·중년·노년을 막론하고 무한경쟁의 사회에서 지치고 위로가 필요한 것은 마찬가지다. 자살률 세계 1위에다 출산율 꼴찌인데 두말이 필요한가.

 날씨가 추워졌다. 춥다고 움츠리지만 말고 공연 나들이 한번 하는 건 어떨까. 연극도 좋고 발레도 좋고 음악도 좋다. 예술인들의 삶이 절망으로 더 피폐해지기 전에 차가운 손 한 번 잡아주자. 자그만 손길이 때로 기적을 낳기도 하니까.

민은기 서울대 교수·음악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