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중앙일보 2014-11-28]
이규연/논설위원
‘새로마지 플랜’이라는 게 있습니다. 2006년에 시작된 정부 저출산·고령화 대응계획입니다. 출산 장려금·수당을 주고 산후조리와 보육을 도와줬습니다. 대표적인 대응의 길입니다. 몇 년간 무려 수십조원을 썼습니다만 출산율은 전혀 오르지 않았습니다. 1.18, 지난해 출산율입니다. 그 전해(1.29)보다 떨어졌습니다.
반면 적응의 길은 인구감소를 재앙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애 없는 지옥”(어느 토론회 제목) 같이 국민에게 겁을 준다고 달라질 게 없다는 겁니다. 오히려 인구감소를 양의 경제에서 질의 경제로 옮기는 계기로 삼자는 견해입니다. 지옥과 천국 사이에 단련을 받는 연옥 정도라고 할까요. 단련 여부에 따라 천국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이미 저출산 기조로 들어선 이상 우리가 아무리 발바둥 쳐도 이상적인 출산율 수준으로 올라가기 어렵다는 겁니다. 이보다는 노동생산성을 높이고 소외계층을 끌어올리며 노인 일자리를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일반 국민의 생각은 어떨까요. 얼마 전 국민대통합위원회가 인구정책 관련 토론회를 열면서 253명에게 물어봤습니다. 토론회 전에 1차 조사를 했습니다. 73%가 ‘저출산은 심각한 문제이므로 이를 해소하기 위해 적극 노력해야 한다’고 답했습니다. ‘저출산을 불가피하다고 받아들이고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데 힘써야 한다’는 소수였습니다. 대다수가 대응의 길을 택한 겁니다. ‘저출산=미래재앙’이라는 이미지가 국민의 머릿속에 꽉 박혀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토론 후 조사에서 흥미로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대응파가 73%에서 59%로 뚝 떨어지고 적응파가 27%에서 41%로 올라간 겁니다. 불과 서너 시간 토론을 했을 뿐인데 많은 사람이 인구대책의 인식을 바꾼 겁니다. 한 참석자는 “막연히 출산율을 올려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토론 과정에서 적응 관심을 알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적응의 길을 지지합니다. 수당과 세제 혜택을 준다고 낳지 않을 아이를 낳은 사람은 적다고 봅니다. 출산장려수당은 물론이고 보육지원조차 출산율을 높인다는 증거를 찾기 어렵다는 연구결과도 나왔습니다. 저출산 기조는 장기 구조적 침체와 비슷합니다. 당장 저출산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표피적 시각에 사로잡혀 시간·비용을 낭비해선 안 된다고 봅니다. 특히 소외계층을 제외하고, 일률적인 출산장려금이나 출산수당은 없애는 게 맞다고 봅니다. 이를 노동의 질을 높이고 극빈층을 살피며 노인 일자리를 만드는 데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시시각각(본지 10월 31일자)에서 노인 연령기준을 올리자고 주장했습니다. 중장기적으로 70세, 75세까지 올리면서 일자리를 개발해주면 미래세대의 부양부담이 줄어들 수 있다고 썼습니다. 마침 국민대통합위원회 조사에서 노인 연령기준 상향의 찬반도 물어봤습니다. 토론 전 52%, 토론 후 61%가 찬성했습니다.
두 길은 비슷비슷하게 보이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20년, 30년 뒤 대한민국의 모습은 바뀔 겁니다. 예산집행 방향과 노동·복지의 틀이 움직일 겁니다. 당신은 어떤 길을 가길 원합니까. 결정의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규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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