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4.12.18 한현우 문화부 차장)
대학 4학년생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답답하다.
취직 안 되는 게 사회 탓이고 기성세대 탓이라는데 사실 일자리는 널려 있기 때문이다.
그들과 이야기를 좀 더 해보면 이해가 되기도 한다.
한 달에 100만원, 150만원 주는 일자리는 가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서울의 꽤 괜찮다는 대학을 4년이나 다녔고 토익도 850점이 넘으니 대기업 정도는 돼야 갈 마음이
생긴다고 한다. 이들에게 전쟁의 폐허에서 맨손으로 국가를 일군 할아버지 세대나 공부 열심히 해서
고시 패스하고 취직해서 살아남은 아버지 세대를 말해봐야 소용이 없다.
청년들은 말한다.
"150만원 주는 중소기업에 취직한다고 쳐요. 그럼 장차 나아질 수 있을까요?
과연 우리 아버지처럼 결혼해서 애 낳고 아파트 사고 자동차 살 수 있을까요?"
이들의 진짜 고민은 당장의 취업이 아니라 희망 없는 미래다.
가진 자가 더 많이 갖고 못 가진 자는 영영 더 가질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배짱 하나만 있으면 못할 게 없을 청년들이 왜 이렇게 나약해졌을까.
기성세대는 이해할 수 없다.
이른바 '땅콩 회항(回航) 사건'은 청년들의 자괴(自愧)를 이해할 수 있는 힌트를 준다.
사실 그 사건 자체만 따져보면 그렇게 전 국민의 분노를 살 일인가 싶기도 하다.
항공사 부사장이 승무원의 잘못을 질책하는 것은 당연하며 직원을 야단치다 보면 고성을 지를 수도 있다.
물론 기수(機首)를 돌리게 하거나 기내 난동에 해당하는 소란을 피운 것은 항공법 위반이다.
다른 모든 승객의 시간을 지체시킨 것도 잘못이다.
그러나 이렇게 분노가 가라앉지 않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일단 99.9%의 국민이 1등석이란 곳에 앉아본 적이 없다. 그곳의 서비스가 어떤지도 몰랐다. 이번에 조금 알게 됐다.
땅콩을 접시에 담아서 준다는 것이다. 그걸 지키지 않아 부사장이 불같이 화를 냈다는 것이다.
이코노미석에서 땅콩 달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안 줘서 기분 나빠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다.
안 준 것도 아닌데 화를 내나.
이번 사건을 일으킨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재벌이고 대기업 취직이 보장됐으며 자기가 다니던 회사를 물려받을 것이다.
평생 1등석 말고는 타 본 적이 없을 것이고 이코노미석 다섯 개 좌석의 가운데 자리에 끼어 서울에서 뉴욕까지 14시간을
날아가 본 적은 더더욱 없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열심히 공부하고 경쟁해서 대기업에 입사해 일하던 직원 두 명을 땅콩 때문에 무릎 꿇리고 모욕했다.
그 뉴스를 보는 순간 우리 모두 무릎 꿇린 것 같았다.
가지고도 더 가지려고 안달하는 탐욕스러운 소수(少數) 앞에 모두가 무릎이 꺾인 것 같았다.
그래서 화가 가라앉지 않는다.
청년들은 사회에 나가 열심히 해봐야 무릎 꿇릴 것 같은 불안에 시달린다.
아무리 해봐야 '원래 부자'였던 사람의 발톱만큼도 못 벌 것 같아 두렵다.
그래서 졸업도 안 하고 결혼도 안 하고 아이도 안 낳는다.
그런데 이번에 진짜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것 봐. 사회는 저런 곳이야. 드라마 '미생(未生)'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야" 하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요즘 20대가 특히 나약하다고 탓할 게 아니다.
이렇게 험한 정글 사회를 물려준 기성세대가 자책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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