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時流談論

[사설] 교육부가 '학생 學力 떨어뜨리기'에 몰두하는 나라

바람아님 2014. 12. 19. 09:07

(출처-조선일보 2014.12.19)

교육부가 사(私)교육비를 줄이겠다는 명분으로 EBS 영어 교재에서 사용되는 영어 어휘 숫자를 현행 5668개에서 3000개 안팎으로 줄이겠다고 발표했다. EBS 수학 교재는 현재 8권인 것을 5권으로 줄이고 교재에 실린 문항 수도 2520개에서 2000개로 줄이겠다는 것이다. EBS 교재는 수능(修能)에 연계돼 있어 결국 수능 문제도 함께 쉬워질 전망이다.

올해 수능 채점 결과를 보면 영어 만점자가 응시생의 3.37%였고, 수학B 만점자 비율은 
4.3%였다. 이 두 과목에선 한 문제만 삐끗해도 1등급을 받기 힘들어 '역대 최고의 
물수능'이란 말까지 나왔다. 그런 마당에 교육부는 더 쉬운 교재를 만들고 더 쉬운 
문제를 출제하겠다고 하고 있다.

대학 입시에선 학교생활기록부·수능·면접의 세 가지 자료를 갖고 신입생을 뽑는다. 
이 중 학교생활기록부는 기록 자체를 믿기 힘들다. 
올봄 감사원이 205개 고교 학교생활기록부를 점검해봤더니 고3 학생부 내용을 입시에 
유리하게 고쳐준 사례가 45개교에서 217건 적발됐다. 그나마 믿을 만했던 것이 
수능이었는데 수능의 변별력(辨別力)이 사라지면 상위권 대학들은 면접 위주로 
신입생을 뽑겠다고 할 가능성이 크다. 그 경우 심층 면접은 과거 대학 본고사 비슷한 
역할을 하게 된다. 
학원들은 '본고사 대비반(班)' 간판을 내걸고 수험생들을 끌어모을 것이다.

사교육을 억제해 학생과 학부모 부담을 줄여주는 것은 교육 정책이 추구해야 할 중요한 목표 중 하나다. 그에 앞서 국민 전체의 지적(知的) 수준을 높이고 창의력 있는 미래 
세대를 키우는 과제는 더 놓칠 수 없는 교육 본질의 목표다. 때로 두 교육 목표가 
상충하는 경우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럴 경우 교육 당국은 대한민국 미래와 대한민국 
교육이 지향해야 할 방향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통해 정책 선택을 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교육부는 학생들 실력이야 어떻게 되든 학습 분량을 줄여 사교육을 
잡겠다는 '교육 포퓰리즘'의 외길로만 내닫고 있다.


<관련 칼럼>    [안석배의 동서남북] '숫자 돌려막기' 敎育 정책

(출처-조선일보 2014.12.19 안석배 사회정책부 차장)

우리 대학 입시에는 '701 법칙'이란 것이 있다. 

사교육을 줄이기 위해 수능을 EBS와 70% 연계해 출제하고, 
과목별 만점자를 1%로 맞추겠다는 내용이다.

시작은 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0년 3월 초, 당시 교육부 장관이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올해 수능부터 EBS 교재에서 70% 이상 출제하겠습니다. 
사교육비 부담을 줄이는 효과가 있을 겁니다." 
그해부터 수능 날 "국어는 EBS에서 ○% 출제됐다" 
"영어는 ○%다"라고 발표한다. 
하지만 수험생들이 얼마나 공감했는지, 사교육비가 얼마나 줄었는지는 모르겠다.

1년 후엔 '수능 과목별 만점자 1% 정책'이 나왔다. 
과목별 수능 만점자가 응시생의 1%가 될 정도로 평이하게 출제해서 사교육을 
줄이겠다는 취지였다.

무슨 정책이든 시작할 때는 이렇게 훌륭하다. 
하지만 이후 학교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학생과 학부모들이 아주 잘 안다. 
학교에서 교과서가 사라지고 EBS 교재가 이를 대체했다. 
EBS 영어 교재에서 영어 지문은 무시하고 한글 번역본만 외우는 변종 '수능 공부법'이 
생겼다. 수능 출제진은 매년 EBS 문제를 놓고 이리 비틀고 저리 비틀다가 문제 오류가 
잇따라 발생했다.

'만점자 1%' 정책은 처음부터 비틀비틀했다. 
모든 과목 난이도를 똑같이 맞추는 것은 불가능한 '미션'이었다. 
어떤 과목은 만점자가 2% 나왔고, 다른 과목은 0.5% 나왔다. 
그러자 교육부가 내놓은 변명이 가관이다. "과목별 만점자의 평균을 1%로 맞춘다는 
얘기였다." 이 정책이 시행 2년 만에 사라진 이유가 있다.

교육부가 이달 초엔 또 다른 숫자를 들고나왔다. 이번에는 '20'이다. 
고등학교에서 교내상(賞)을 운영할 때 대회 참여 학생의 20%에게만 상을 주라는 지침을 내렸다. 학교생활기록부에 교내 경시대회만 기록할 수 있게 하자 학교에 교내상이 
넘쳐나게 되면서 내놓은 대책이다. 
하지만 이 제도로 특목고 등 일부 고교만 유리해졌다는 얘기가 나온다. 
엊그제 나온 정부 정책에는 EBS 교재의 영어 단어 숫자를 5668개에서 2988개로 
줄이겠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영어 단어 숫자를 제한해 사교육을 잡겠다는 발상이 
놀랍기만 하다.

우리 교육이 안고 있는 문제의 환부(患部)는 더 깊은 데 원인이 있는데 
매번 졸속 '숫자 돌려막기' 정책이 판을 친다. 대학에 목을 맬 수밖에 없는 사회, 
스펙 쌓기를 할 수밖에 없는 대입 제도, 학교를 외면하고 학원으로 달려가는 
교육 현실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문제가 나오면 일단 틀어막고 비틀어 보는 식이다.

오늘(19일), 전국 대학에서 2015학년도 대입 정시 모집 원서 접수가 시작된다. 
수험생 부모라면 입시에 사용되는 대학별 환산 점수를 보고 기가 질렸을 것이다. 
소수점 다섯째 자리까지 나오는 숫자는 웬만한 난수표보다 복잡하다. 정부가 입시를 
규제하면 할수록 대학은 이를 피해서 더 복잡한 '입시 방정식'을 만든다. 
우리 학생들이 처한 현실이 이렇다. 다음엔 또 어떤 숫자가 교육 정책이란 이름으로 
포장돼 나올지 걱정스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