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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2)

바람아님 2013. 2. 27. 00:35

▼합장한 두 스님 닮아··· 기도발 세다고 발길 붐벼▼


고깔과 장삼 차림의 두 스님이 참선을 하고 있는 모습의 선바위



● 선바위 이야기

인왕산 ‘선바위’는 기도터로 유명하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고 믿는다. 그만큼 ‘기도발이

세다’는 것. 아이 갖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아이를 기원하는 바위’라는 뜻의 ‘기자암(祈子巖)’

이라고 불릴 정도다. 작은 돌을 문질러서 신령스러운 선바위에 붙인 자국도 많다. 그렇게 해야 자식 생산에

효험이 크다는 것이다. 선바위를 ‘붙임바위’라고도 부르는 이유다.

선바위의 ‘선’은 보통 한자의 ‘禪(선)’자로 해석한다. 바위가 ‘두 스님의 참선(參禪) 모습’을 닮았다. 그러고

보니 ‘고깔과 장삼 차림의 두 스님이 합장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뒤쪽에서 보면 영락없는 ‘도포 입은

스님의 뒷모습’이다. 바위에 눈이 쌓이면 공력 높은 조실스님 같다.

‘서 있는 바위(立巖)’라는 뜻의 선바위라는 설도 있다. 마을 앞에 선돌을 세우거나 돌무더기를 쌓는 ‘바위 숭배

사상’의 흔적이라는 주장이다. 일종의 돌미륵사상과 통한다. ‘돌미륵의 코를 문지르면 아이가 생긴다’는 속설도

선바위 ‘돌붙임’과 흡사하다.

선바위는 한양 도성 바로 밖에 자리한다. 코앞에 서울 성곽이 가로막고 지나간다. 그 너머는 임금이 살고 있는

궁궐이다. 전설에 따르면 애초 무학대사는 선바위를 도성 안에 둬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고 한다. 하지만

유학자 정도전이 태조 이성계를 설득해 성밖으로 밀어내 버렸다는 이야기다.

유교의 합리성이 불교나 민간신앙의 신비주의를 이긴 것이다. 무학대사는 “이제 승려들은 선비들의 책보따리나 지고 따라다닐 것”이라며 한탄했다고 한다. 결국 승려와 무당은 조선 500년 동안 성 안에 들어가 살 수 없었다.

조선이 ‘선비의 나라’가 된 것이다.

이성계는 꿈 이야기로 얼버무리며 무학의 체면을 살려줬다. ‘꿈속에 눈이 엄청 내렸는데 인왕산에 가보니 선바위 쪽은 그대로 쌓여 있고 그 너머 쪽은 고슬고슬 모두 녹았더라’는 것이다. 


 선바위 아래에는 국사당을 비롯해 무속신앙 받드는 집이 많다. 국사당은 전국 무당들의 으뜸 굿판 메카. 원래 남산에 있었지만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이곳으로 옮겨버렸다. 요즘도 내림굿, 치병굿, 재수굿 등이 수시로 벌어진다.

▼막다른 골목 내달리던 시인 이상… 윤동주는 계곡 아무데서나 세수▼


● ‘시인의 마을’ 서촌

윤동주



윤동주 시인(1917∼1945)은 인왕산 자락 서촌에서 연희전문학교를 다녔다. 1941년 문과 졸업반 땐 누상동 9번지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넉 달 동안 하숙생활도 했다. 2년 후배 정병욱(1922∼1982·국문학자)이 그의 룸메이트였다.

윤동주는 만주 북간도 출신, 정병욱은 경남 남해 섬이 고향이었다. 한반도의 남북 끄트머리에 사는 두 촌놈이 만난 것이다. 생전 정병욱의 회고에 따르면 윤동주는 걷기를 좋아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누상동 뒷산 인왕산 중턱까지 산책부터 했다. 세수도 인왕산 골짜기 아무데서나 하면 그만이었다. 수업이 끝난 뒤엔 소공동 한국은행 앞까지 전차를 타고 나가 책방을 순례했다. 광화문 종로 인사동 거리를 거닐고 가끔 음악다방, 영화관에 들렀다. 현재 인왕산 아래엔 윤동주문학관과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 있다.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보내주신 학비봉투를 받아//대학 노트를 끼고/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시가 이렇게 쉽게 써지는 것은/부끄러운 일이다.’(윤동주 ‘쉽게 써진 시’에서)


이상

천재 시인 이상(1910∼1937)은 서촌에서 태어나 감수성 많은 유년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당시 서촌 옥인동 47-3번지엔 친일 매국노 윤덕영(1873∼1940)의 별장(1973년 철거)이 있었다. 대지 9917m²(약 3000평), 연건평 3884m²(약 1175평)의 엄청난 규모. 당시 동아일보(1924년 7월 21일자)엔 ‘2층에 뾰족한 머리(옥탑)까지 얹어, 어린아이들조차 악마가 얼어붙은 것처럼 흉하게 보았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마침 이 집 대문은 막다른 골목에 있었다.

김민수 서울대 교수는 이상의 오감도 ‘시 제1호’ 내용이 이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오.(길은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오.)’ 구절은 이상의 어릴 적 경험이 내재적 동기가 됐다는 것이다. 서촌의 막다른 골목에 맞닥뜨리며 느꼈던 유년시절 공포의 기억이 녹아 있다는 말이다. “이 놈들, 냉큼 가지 못해! 뿔 달린 귀신이 잡아간다!” 윤덕영 하인들의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다.

마침 옥인동엔 이완용의 저택도 있었다. 이완용은 1910년 나라를 판 대가로 옥인동 19번지 전체(현 옥인파출소 앞∼자하문로)에 이르는 엄청난 땅을 받았다. 이곳도 아이들에겐 ‘무서운 골목’이었으리라.

현재 이완용 집은 옥인동사무소 앞 19-16에 ‘쪼그라진 폐가’로 방치돼 있다. 1937년 윤덕영이 그의 딸을 위해 지은 2층집(옥인동 168-2)은 동양화가 박노수가옥(서울시문화재자료 제1호)으로 남아 있다. 내부 수리를 거쳐 곧 미술관으로 문을 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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