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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夫婦의 調律

바람아님 2015. 7. 9. 08:35

조선일보 : 2015.07.08

20代에 꿈꾼 핑크빛 사랑은 결혼한 뒤엔 퇴색하기 마련
'義理로 같이 산다' 말은 해도 큰 다툼 피하려 편지로 소통
단번에 똑같이 맞추려 말고 틈틈이 조율해 살면 어떨까

원지우 수필가 사진
원지우 수필가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습니까.' 몇 년 전 나왔던 영화 제목이다. 젊은 두 부부가 서로 상대방 배우자에게 끌리는 아슬아슬한 내용이었다. 크게 재미있지는 않았지만 제목이 인상적이었다. 중년 부부들에게 같은 질문을 하면 어떤 답이 나올까? 많은 부부는 말한다. "한때는 그 사람이 없으면 죽을 거 같았는데 지금은 그 사람 때문에 죽을 거 같다"고. 그게 현실이 아닐까.

사랑의 빛깔은 다양하다. 뜨거운 핏빛 사랑부터 가슴 아픈 잿빛 사랑까지 모두 다 사랑이다. 20대에는 핑크빛 사랑을 꿈꾼다. 누구나 왕자와 공주를 만날 것 같은 환상 속에 산다. 핑크빛이었던 사랑은 결혼과 함께 점차 퇴색돼 간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던 해 남자를 소개받고 3개월 만에 결혼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어떻게 그렇게 아무 생각이 없었는지. 직장 초년병이었던 남편은 선을 보고도 바빠서 몇 번 만나지도 못했는데 벌써 나의 아버지한테 결혼을 하겠다고 말했다. 요즘처럼 프러포즈가 중요한 이벤트인 시절이 아니어서 정식으로 청혼을 받지도 못했는데 어른들끼리 날을 잡은 것이었다. 몇십년 함께 살다 보니 서로 적응해갔고 차츰 믿음이 생겼다. 이런 것도 사랑이려니 생각하고 살았다.

"지금은 아니라도 사랑해서 결혼했을 거 아냐?" "아니, 그냥 했어."

사람들의 질문에 내가 너무 무심하게 대답해서였을까? 묻는 사람마다 당황했다. 남들이 "사랑해서 사는 게 아니면 왜 사는 거냐"고 물어볼 때마다 고민 끝에 나는 겨우 답을 찾아냈다. "의리로 산다."

서로 맞지 않는 부분도 있고 힘들 때도 많았지만 한번 맺은 인연이니 노력하면 어쨌든 살아지는 것이라고 믿는다.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은 누구에게나 있다. 지나간 일은 잘 후회하지 않는 성격이지만 한 번도 연애를 못 해본 내게 연애결혼은 어떨까 하는 궁금증이 남아 있었다. 연애결혼 해서 다정하게 사는 부부들을 보면 부럽기도 했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그런데 평생을 함께 살아도 어린 시절의 입맛은 맞춰지지 않나 보다. 아빠는 생김을 그냥 구워서 간장 찍어 먹는 걸 좋아했는데 엄마는 항상 기름 발라 소금 살짝 뿌려 구워 주셨다. 아빠는 그냥 구워 달라는데 그게 뭐 어렵다고 안 해주냐고 불평했고, 엄마는 더 맛있게 해주는데 웬 타박이냐고 야단을 하셨다. 그 언쟁은 식탁에 김이 올라올 때마다, 내가 결혼해 집을 떠난 후에도 계속됐다.

친정 엄마는 황해도 연안, 아빠는 경상도 포항이 고향이다. 엄마는 월남해서도 서울 가회동 한옥에 살던 부잣집 딸이었고, 아빠는 포항에서도 더 들어간 산골의 가난한 집 아들이었다. 너무나 다른 문화적 환경을 갖고 어떻게 연애를 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어렸을 땐 부모님이 싸우는 게 싫어서 그냥 한쪽이 맞추면 되지 않나 싶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부 생활에는 그렇게 작은 것도 포기할 수 없는 많은 이유가 숨어 있지 않나 싶다.

보통 부부는 무조건 맞춰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는 것 같다. 사랑해서 결혼했으면 최대한 양보하고 조화를 이뤄 살아야겠지만 다른 사람을 내게 100% 맞출 수는 없다. 사람은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부부라도 서로 다른 것은 인정하고 존중해가며 살았으면 좋으련만 나같이 만들려는 고집으로 싸우고, 안 맞는다고 헤어지기도 한다. 똑같이 맞추느라 싸우지 말고, 한꺼번에 맞추느라 지치지 말고, 사는 동안 틈틈이 조율해가며 살면 어떨까?

의리로 사는 부부라도 우리만의 조율 방법은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남편과 말하다 싸울 수밖에 없는 큰일이다 싶으면 편지를 썼다. 편지에 답장은 없었지만 남편은 느낀 점이 있는 듯했다. 남편이 집에 와서 회사 일로 짜증을 부리거나 괜한 트집을 잡으면 나도 스트레스가 쌓였다. 매일 싸우기 싫어 한동안 참았다가 폭발한 적도 있다. 오래 함께 살다 보니 언제부터인가 남편도 그 눈치를 알게 됐다. 내가 폭발하기 직전이면 꽃을 한 다발씩 사갖고 들어왔다. 그러면 우리는 말없이 넘어가곤 했다.

베토벤 현악 4중주 14번은 7악장까지 쉬지 않고 연주한다. 베토벤이 그렇게 써놓았다. 중간에 절대 쉬지 말라고. 베토벤은 무슨 생각으로 쉼표 없이 계속 연주하도록 요구한 것일까? 다른 곡들은 악장 사이에 잠시 숨을 돌리고 예민한 현악기들은 다시 조율한다. 그런데 7악장까지 40분 넘게 계속 연주하려면 현(弦)은 늘어지고 음(音)도 달라진다. 그렇게 흐트러진 악기로 4중주를 하려면 연주자들은 서로 맞추기 위해 극도의 긴장 상태로 노력해야 한다. 네 명이 함께 연주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음이 잘 맞지 않는 현악기로 서로 맞추려면 얼마나 어려울지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조율 없이 40분을 연주하는 것도 힘이 드는데 조율 없이 살아가는 인생 40년은 어떨까. 평생 그렇게 긴장 상태로 살 수는 없을 것이다. 살기에 바빠서 여유 없이 젊은 날을 보내고 나면 중년이 돼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20여년 서로 다른 삶을 살다가 수십년을 함께해야 하는 부부 관계에선 더욱 그렇다. 완전히 틀어져 버리기 전에 부부 사이도 다시 조율해 살면 그런대로 살 만하지 않을까 싶다.

 

원지우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