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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밥과 술이 익는 대폿집

바람아님 2015. 7. 15. 08:55

경향신문 2015-7-15

 

1980년대까지만 해도 대도시 뒷골목에는 대폿집이 즐비했다. 실비집이라고도 하고, 그냥 막술집이라 부르기도 했다. 흥이 나면 장대비 들이치는 소리 비슷한 젓가락 반주 소리도 간간이 나오고, ‘나그네 설움’이니 ‘황성옛터’ 같은 노래를 라이브(?)로 들을 수도 있었다(실제 나는 이 노래들의 가사를 대폿집 창문 너머로 듣고 외웠다).

 

나무로 틀을 짠 유리창에 종이로 소박하게 메뉴를 써서 붙이고, 간판은 합판이나 함석 위에 유성 페인트로 쓰는 게 고작이었다. 그때 간판집 기술자는 붓 하나로 먹고살았다. ‘대포’를 ‘大匏’, 즉 큰 바가지로 보는 이도 있다. 말통으로 막걸리를 받아다 팔던 시절에는 커다란 술잔이 매력이었다. 대포(바가지)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대포 한잔하자’고 하고, 그 말에는 따뜻한 정이 깃들어 있다.

 

대폿집의 정경 중에 생각나는 건, 목에 수건을 두른 막노동자들이 미제 ‘도라무통’을 둘러싸고 앉아 뭔가를 구우며 막소주나 대포를 마시는 장면이다. 노동자가 막걸리를 벌컥벌컥 마실 때 청동빛 목울대가 꿀꺽꿀꺽, 움직이던 모습이 기억에 선명하다. 막걸리잔으로 알루미늄이 쓰였다고 하는데, 술값을 올리지 못해 그 잔을 찌그러뜨려 용량을 줄이는 식으로 버텼다는 대폿집 사장의 증언도 있었다. 요즘은 전문업소의 메뉴로 독립한 돼지갈비, 닭볶음탕, 감자탕이 모두 대폿집의 인기 메뉴였다. 종이로 ‘감자국 개시’라고 술집 문에 써붙인 것을 읽은 기억도 있다(40년 전의 일이다. 예전에는 탕이 아니라 감자국이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대폿집이란 거의 모든 밥집과 술집을 수렴하는 최고의 업소였던 것이다. 실비집이란 ‘實費’, 즉 이문 적게 보며 싸게 파는 집이란 뜻이다. 대폿집과 같다. 아닌 게 아니라, 1970년대까지만 해도 대도시에서 안주는 원가로 내고 술값으로 몇 푼 남기는 집이 많았다고 한다. 임대료가 비싸지 않던 시절에나 가능한 일이다. 이런 실비집의 정서는 아직도 지방에 남아 있다. 술 한잔 시키면 소소한 안줏거리를 내주는 것이다. 남도지방에 이런 집들이 많은데,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전주 막걸리 골목의 영업방식도 바로 이 정서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런 훈훈한 술집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주변에 꽤 된다. 우연히 사진작가 김지연씨의 책 <삼천원의 식사>를 보고, 친구들과 무단히 남도 길을 재촉했다. 지전 몇 장에 푸짐한 김치찌개가 보글보글 끓었다. 깻잎 솎아내어 고추장과 된장으로 무친 나물, 묵은 김장김치와 새콤한 오이무침이 찌그러진 양은상에 올랐다. 마침 장맛비가 들이치니, 그런 낭만이 따로 없었다. 시절은 수상하고, 사람들은 술을 마신다. 기회 있으면 남도의 조용한 장터 골목에서 막걸리 한 병을 시켜볼 일이다. 아마도, 미구에 사라질 민중적 술집의 마지막 풍경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화가이자 작가 사석원 선생의 대폿집 기행 <막걸리 연가>도 참고하면 좋겠다.

 

<박찬일 | 음식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