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10월 ‘여순사건’ 진압을 위해 광주 토벌사령부에 내려간 박정희 소령(왼쪽)이 송호성 사령관과 협의를 하고 있다. 박 소령은 서울에 복귀한 뒤 남로당 군사책 혐의로 숙군 대상에 올라 사형 위기를 맞았다. 사진 전문잡지 라이프에 실린 사진.
1950년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문관으로 근무하던 박정희 작전정보실장은 6·25 남침 당시 구미 고향 집에 있었다. 그가 화물차를 얻어 타고 서울에 도착한 건 27일 오전 7시. 그 시점부터 28일 오후 5시 수원에 마련된 임시 육본에 그가 나타날 때까지 ‘박정희 문관’의 34시간 행방은 정보국의 큰 관심이었다. 김종필 중위는 정보국 북한반장이었다. 박 실장은 49년 숙군(肅軍) 때 남로당 연루 혐의로 사형 구형을 받고 강제 예편됐다.
박 실장이 한강을 건너 수원 육본에 나타나면 좌익 의혹을 씻을 수 있는 반면 나타나지 않으면 의혹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김종필(JP) 전 총리는 중앙일보 증언에서 “28일 새벽 한강 다리가 폭파돼 나는 바지선으로 강을 건너 수원까지 걸어갔다. 박정희 문관이 나타나주길 간절히 바랐다. 오후에 육본에 도착하니 박 전 대통령은 이미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휴~ 빨갱이는 아니었구먼요.’ 혼잣말이 저절로 나왔다”고 회고했다.
전영기 기자
[중앙일보 창간 50년 기획] 김종필 증언론 '소이부답'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