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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누룩' 같은 사람

바람아님 2016. 3. 4. 23:35
문화일보 2016.03.04. 14:20

박동규 / 문학평론가, 서울대 명예교수

봄꽃들이 손에 들고 다니는 부채처럼 순서에 맞춰 변함없이 피어날 때가 됐다. 매화꽃으로부터 사과나무에 꽃이 피는 아름다운 계절이 벌써 가까이 보이는 산에 내려앉고 있다. 갑자기 ‘누룩’이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툭 튀어 올랐다. 왜 그랬는지는 한참 뒤에야 알았다. 방 안 꽃병에 꽃이 가득 꽂혀 있었다. 꽃들은 방 안의 공기를 향기로 슬그머니 바꿔 놓았다. 이처럼 소리도 없이 스며들어 다른 세계로 변화시키는 향기를 생각하다가 누룩이 떠오른 것이다.

누룩 이야기는 어린 날, 할머니에게서 들었다. 제사를 앞두고 단지에 술을 빚을 때 쓰는 발효제로, 누룩의 효소가 술을 익게 한다고 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둘러앉아 사발에 노르스름한 막걸리를 따라 마시던 광경을 보았다. 그때 본 막걸리를 내가 다시 만난 건 한참 뒤였다.


나는 한강변 원효로에서 전차를 타고 광화문에서 내려 서대문 쪽으로 걸어가야 하는 고등학교에 다녔다. 학교가 파해서 집에 오려면 광화문에서 땡땡 소리가 요란한 작은 전차를 타야 했다. 집에 돌아오는 시간은 항상 해 질 녘이었다.

어느 날 해 질 무렵 집 현관에 들어서서 가방을 마루에 내려놓았다. 어머니가 부엌에서 양은 주전자를 들고 나왔다. 시장에 가서 막걸리를 한 되만 사오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막걸리 파는 곳을 몰랐다. 어머니가 시장 안 생선 가게 옆이라고 했다. 전차 두 정거장 거리에 떨어져 있는 시장으로 갔다. 막걸리 집을 겨우 찾아 막걸리 한 되를 달라고 했다.


그러자 아저씨는 교모와 교복을 입고 있는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한 되면 되겠나?’ 하고 퉁명스럽게 물었다. 나는 어머니가 사오라고 해서 왔다고 했다. 아저씨는 그제야 얼굴을 풀면서 ‘너희들이 술 마시려고 하는 줄 알았지’ 하면서 주전자에 가득 채워 주었다.


어머니는 그 막걸리를 양푼에 담아 놓았던 밀가루에 부어 반죽을 했다. 그러곤 하얀 보자기를 덮어 안방 아랫목에 놓아두었다. 다음 날 학교에서 돌아오자 어머니는 양푼에 씌워 놓았던 보자기를 벗겼다. 밀가루 반죽이 부풀어 올라 있었다. 어머니는 이 반죽을 주물러 주먹만 한 빵을 쪄 주었다. 이후 나는 주전자를 들고 막걸리 집을 열심히 다녔다. 어머니는 반죽을 할 때마다 “이 막걸리는 누룩이 들어 있어 빵을 부풀게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좋은 사람은 누룩과 같아서 어디에 가서도 여러 사람을 선하게 바꿔 놓는 힘이 있다”고 했다. 약간 시큼한 맛이 남아 있는 부푼 빵은 배고픔을 달래주는 최고의 간식이었다. 이 빵 한 조각은 동생들에게, 골목에 나가 딱지 한 움큼씩을 갖고 들어오는 기쁨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말은 흘려듣곤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나는 가끔 어머니가 말한 ‘누룩 같은 사람’을 생각했다. 일터에 나가 많은 사람과 어우러져 살면서 ‘누룩 같은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된 때문이었다. 어쩌다 오랜 친구들이 모이자고 하면 시간을 내어 어울리곤 한다. 반가운 친구들을 만나면 식사를 하면서 화기애애하게 얘기를 나눈다.

그런데 언젠가는 한 친구가 그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누구를 비판하는 것이었다. 그 친구는 욕을 섞어가며 우리와 상관없는 사람을 큰소리로 비난해 좌중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그냥 듣고만 있었다. 차분히 말해도 될 것을 마치 연설하듯 온갖 비방을 하면서 좌중의 동의를 구했다. 모처럼 흔쾌히 만났던 우리는 어둠 속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그 친구 말의 옳고 그름보다는, 엉뚱한 얘기로 오랜만에 같이한 친구들의 반가움을 잊게 하는 게 안타까웠다.


하지만 때로는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를 뒤바꿔 놓는 친구도 있었다. ‘내가 노래 한 곡 하지’ 하고 스스로 일어서서 가곡을 절창했다. 그가 노래 한 곡을 뽑고 나면 모두 넋을 잃고 박수를 보냈다. 그러면 우리는 일상의 즐거움으로 돌아갔다. 누룩이 밀가루 반죽에 스며들어 빵을 부풀게 하듯이, 선한 사람이 끼어 있어 마음을 밝게 하고 풍성한 삶의 밝은 세계를 꿈꾸게 하는 힘이 있는 그가 좋아 보였다.


누룩처럼, 나의 삶에 영향을 미친 이가 삼촌이다. 삼촌은 일제강점기에 경주에서 서울로 유학 와서 중동중학에 다녔다. 배화여고 근처 한옥 집 문간방에 세 들어 자취를 하며 학교에 다녔다. 열두어 살 때부터 혼자 자취하며 중학교에 다녔다. 오 년이라는 긴 시간을 고향 할머니가 보내주는 적은 생활비로 자취를 하다 보니 겨울철에 아궁이에 불도 제대로 지피지 못했다.

졸업했을 때, 삼촌은 폐결핵에 걸려 꿈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고향 집에서 삼촌과 어울렸다. 삼촌은 고향에서 할머니와 투병 생활을 하면서 교회를 통한 봉사 활동을 했다. 그러던 삼촌이 서른다섯이던 해 세상을 떠났다. 내가 대학에 입학한 봄이었다. 삼촌은 선산에 잠들었다. 산에서 집으로 돌아오니 삼촌과 보낸 일들이 떠올랐다.


삼촌이 살아 있던 동안에는 밥상을 마주한 적이 없었다. 뛰어가 안기려 해도 두어 발짝 뒤로 물러서곤 했다. 마스크도 항상 쓰고 있었다. 병균을 옮길까 봐 그랬다. 할머니께 삼촌이 써온 시와 그림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작은 목소리로 할머니는 “삼촌이 며칠 전부터 아궁이에 무엇을 태우느라고 불을 지폈어. 알고 보니 시 원고와 그림들을 다 태운 거야”라고 했다. 나는 너무 야속했다. 정을 끊고 떠난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내, 말끔하게 자리를 정돈해 놓고 남은 이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애쓴 삼촌의 마음이 그대로 내 가슴속으로 들어왔다. 곰삭은 누룩 같은 냄새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