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에서 과학고에 다녔던 5년 동안 역사와 철학에 대해선 애증의 감정이 강했다. 수업이 아주 재미있고 어린 내 마음을 움직였지만 한편으론 배운 것들이 실제론 쓸모없을 것 같아 답답하기도 했다.
과학고이지만 인문학도 중시해 고대 로마와 그리스의 고전을 읽고 시험을 쳐야 했다.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아리스토텔레스부터 마키아벨리·데카르트·스피노자·로크·쇼펜하우어·칸트·헤겔·니체·사르트르·비트겐슈타인·크로체 등 서양사상가들의 이론을 매주 6시간씩 공부했다. 철학 수업은 아주 흥미로웠지만 인생에 꼭 필요한 것인지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대학 졸업 뒤 영어도 제대로 못하고 엑셀도 제대로 몰랐던 내가 한국에 와 취업을 하면서 ‘역사와 철학을 공부한 시간이 낭비였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탈리아에선 급변하는 현대사회의 요구를 충족하지 못하고 고전 위주로 진행되는 교육제도를 비판하는 사람이 많다. 나도 한국에 처음 왔을 때는 정보기술(IT)·영어 등 실용 과목 중심의 한국 교육제도가 이탈리아보다 더 현실적이라고 느꼈다. 그래서 취업 뒤 부족했던 영어나 IT, 엑셀 실력을 보충하려고 노력하면서 다른 한국 사람처럼 써먹을 데가 있는 것을 공부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하지만 요즘 철학·역사 강연을 들으면서 아이들에게 기술을 가르치는 것보다 세상에 나가서 잘 살 수 있는 기본적인 인문학 능력을 길러 주는 것이 오히려 더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새로운 기술이나 능력을 배양하는 것은 쉽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사회를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비판적 사고를 기르는 것은 역사·철학·고전문학이라는 바탕이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최근 어느 한국사 강연에서 “내 뒤에 이순신 장군, 세종대왕, 이율곡 선생 같은 분들이 계셔서 두려워할 게 없고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언제나 뚜렷하게 보인다”는 말을 들었다. 이 말을 들으며 내가 학교 때 문학·역사·철학을 열심히 공부했던 것이 낭비가 아니고 평생 나를 지탱해 주는 근본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중에 자녀가 태어나 한국에 계속 살게 된다면 국·영·수를 중심으로 가르칠지 문·사·철을 중심으로 공부하게 할지 고민하게 될 것 같다.
알베르토 몬디 JTBC ‘비정상회담’ 출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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