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언컨대 마음에서 일어나는 집착과 탐욕은 일상을 헤어나기 어려운 불쾌감으로 싸 바르는 주범이다. 이오네스코의 걸작 희곡 ‘왕은 죽어가다’는 의연한 자세로 인생의 끝을 맞이하는 군주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특히 병석에서 신음하는 왕을 두고 왕비가 속삭이는 장면은 감정의 집착과 미련으로 마음 졸이기 일쑤인 내게 큰 힘이 돼 준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한다는 것은 그가 아무런 집착 없이 편히 쉴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인지도 몰라요.”
실제로 초연한 마음가짐은 현명한 삶의 자세를 흩뜨리는 문제들에서 벗어나는 동력이 돼 준다. 한마디로 가벼워지는 것이 관건이다. 지금 당장 우리의 영혼에 짐이 되는 모든 잡동사니를 걷어내는 일.
초조와 불안에 시달릴 때마다 나는 플라톤에게서 빌려온 수행법을 애용한다. 이 위대한 그리스 사상가에게 철학이란 곧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견딜 수 없을 만큼 근심에 시달릴 때 나는 모든 걸 제쳐 두고 편안한 자세로 누워 마음의 헛된 욕심과 갈증이 증발하도록 나를 가만히 놓아둔다. 실천 불가능한 미래의 계획들, 이루지 못한 과거의 회한, 비현실적인 기대들을 말 그대로 모조리 놓아버리는 것이다. 세상이 나 없이도 잘만 굴러감을 깨닫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자유인가.
언젠가 나의 가족, 나와 가까운 사람이 나 없는 세상을 헤쳐가야 할 때는 반드시 온다. 이런 인식 어디에도 우울한 감정이 틈입할 이유는 전혀 없다. 오히려 나는 벌떡 일어나 놀라운 활기를 되찾는다. 잠시나마 골치 아픈 자아가 쫓겨나기에 가능한 현상이다. 나라는 존재가 절대적이며, 대체 불가능하다고 믿는 것은 얼마나 터무니없는 오만인가. 두려움 없는 미래로 나아가고 싶다면 자아의 무거운 바닥짐부터 덜어낼 필요가 있다.
말은 이렇게 해도 솔직히 죽음에 대한 공포가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니다. 내가 스위스 로잔에 살 때 겨울 저녁 도심거리를 거닐다가 어느 영안실 앞을 지나친 적이 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린 기억이 난다. “제발 다시는 이런 으스스한 장소에 발길 닿는 일이 없기를.” 얼마 후 나는 친구의 초대를 받고 그가 아는 어떤 사람의 집을 찾게 되었다. 그런데 하필 약속 장소가 바로 그 으스스한 영안실 위층이 아닌가.
내 친구의 친구라는 사람이 그곳에서 근무하는 장의사였던 것이다. 이후 나는 관들이 즐비한 으스스한 공간을 요리조리 비집고 들어가 그날 새로 사귄 장의사 친구와 맛나는 퐁뒤를 먹어가며 이런저런 인생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우는 사이가 됐다. 유쾌하고 선량한 그 친구는 밤새도록 내게 자기 직업의 이모저모를 이야기해 주었고, 결국 나는 일주일 동안 곁에서 그가 하는 일을 구경할 기회까지 얻어내고야 말았다.
망자들에게 심혈을 다해 바치는 그의 무한한 노고와 정성을 지켜보면서 나는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우리가 사는 매 순간이 바로 선물이며, 우리의 몸은 깨어 있는 의식을 담아내는 그릇이자 신과의 합일을 이뤄내는 용광로임을 그때 나는 깨달았다.
지금 당장은 물살을 원만히 가르고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려면 순풍은 물론 역풍까지도 지혜롭게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네 인생이 임기응변을 필요로 하는 항해술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다가 죽음의 시간이 닥치면 그때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묵직한 말씀 한마디 떠올리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그대는 배에 올랐고, 바다를 건넜으며, 뭍에 다다랐으니 이제 배에서 내려라!”
졸리앙 스위스 철학자 / 번역 성귀수
[중앙일보]
입력 2016.07.02 00:43
장의사는 지혜의 스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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