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에 차례를 지낼 때 사용하는 그릇은 제기(祭器)다. 신에게 바치는 제물을 올리는 귀중한 예물(禮物)인 제기는 전통적으로 금속, 나무, 도자 등으로 제작됐다.
15일 국립중앙박물관에 따르면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내세운 조선에서 제기는 특히 중요시됐다. 초기에는 중국의 제기 제작 교본인 '제기도설'에 나오는 금속 제기를 본뜬 도자 제기가 만들어졌으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뒤에는 조선의 독창적인 미감이 돋보이는 백자 제기가 생산됐다. 조선시대 후기의 제기를 보면 정갈하고 청아한 멋이 느껴진다.
그런데 조선시대 양지현이 있었던 경기도 용인시 양지읍에서 1980년대 수습된 16∼17세기 제기 100여 점 중 산뢰(술과 물을 담는 그릇)와 희준(소를 형상화한 그릇) 등에서는 일부러 타격해 부순 흔적이 발견된다. 신성한 물건인 제기를 파손해 묻은 것이다.
이처럼 제기를 깨뜨린 이유는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을 수 있다.
중종 23년(1528) 기록을 보면 "신어(神御) 앞에서 쓰는 그릇은 어기(御器)로 사용해도 안 되고 또한 많은 사람이 쓰게 해서도 안 된다"는 문장이 있다. 또 "창고 안에 흩어놓으면 하인들이 딴 데다 쓸 폐단이 있다"면서 "완전한 대로 묻으면 몰래 파낼 폐단이 없지 않으니 모두 부수어서 묻게 하라"는 명령도 나온다.
이에 대해 김현정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조선시대에 제기는 일상용 식기와는 완전히 구분해 사용했다"면서도 "제기를 훔쳐다 식기로 쓰는 폐단이 전혀 없지는 않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조선 왕실이 제기의 재활용과 도난을 우려했던 것은 도자기가 귀했던 당시의 사회적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김 연구사는 "임진왜란 이후에도 조선이 국영 공장에서 생산한 물품은 무기와 백자뿐"이라며 "조선 초기 조정이 분청사기를 공납으로 받을 때도 지방 관리들이 빼돌리는 사례가 잦았다"고 설명했다.
용인 양지에서 수습된 제기 중에는 산뢰와 희준 외에도 상준(코끼리를 형상화한 그릇), 작(술을 담는 넓은 잔), 보(곡식을 담는 그릇) 등이 있다. 또 철화 안료로 바닷게를 그린 이(물을 담는 그릇)와 흑상감 기법으로 사람 얼굴을 표현한 이도 있다.
김 연구사는 "양지의 제기들은 지방 향교 등 상대적으로 위계가 낮은 제사에서 사용됐던 기물로 추정된다"며 "조선 전기와 후기 사이의 과도기적 양상을 보여주는 유물"이라고 평가했다.
조선시대 예 문화를 상징하는 제기는 국립중앙박물관 테마전시실에서 전시 중이다. 조선의 도자 제기를 주제로 한 최초의 기획전으로, 10월 23일까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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