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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조선 마지막 왕 순종은 왜 풍수의 금기 지역에 묻혔나

바람아님 2016. 10. 15. 23:53
조선일보 : 2016.10.15 03:00

[김두규의 國運風水]

영화 '덕혜옹주'가 개봉 두 달 만에 550만 관객을 동원하며 인기를 끌었다. 그 덕분으로 덕혜옹주 무덤이 11월 30일까지 임시 개방됐다. 덕혜옹주 무덤은 아버지 고종과 오라버니 순종황제의 무덤이 있는 홍유릉에 있다. 옹주 무덤도 근처의 다른 황족(영친·의친왕) 무덤들도 망국의 후예들이라 초라하다.

19세기 말 조선과 일본 두 나라 능의 풍수관은 두 국가의 흥망에 서로 다른 길을 가리키고 있음을 엿보게 한다.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과 생몰연대가 비슷한 일본 임금은 다이쇼(大正)이다. 순종은 1874년, 다이쇼는 1879년 태어나 둘 다 1926년에 죽는다. 다이쇼는 도쿄 서쪽 40여km 떨어진 하치오지(八王子)시 다마(多摩)릉에 안장된다. 지진으로부터 안전한 곳을 찾은 결과였다. 지진으로부터 안전한 땅이란 어떤 곳일까? 풍수에 부합하는 땅이다. 지맥[龍]이 절도 있게 뻗어오다가 마지막에 단엄한 산봉우리[主山] 하나를 일으켰고 그 아래 다이쇼 무덤이 조성되었다. 좌우 산(청룡·백호)들이 균형과 조화를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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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남양주시에 있는 조선 순종의 무덤 유릉(왼쪽)과 일본 하치오지시에 있는 다이쇼 일왕의 무덤 다마릉. / 김두규 제공
어떻게 그 좋은 자리를 잡았을까? 도다 다다유키(戶田忠至)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1862년 조정에 건의문을 올린다. '일본을 세계 강국으로 실현시키기 위해서 능 정비가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역대 능들이 제대로 보존되지 못하여 만승의 옥체가 황무지에 방치되어 있는데, 이것은 진실로 두려워해야 하고 가슴 아파해야 할 일입니다.' 건의문이 채택되어 중세 이래 '화장 후 석탑 형식'을 버리고 초기 능제, 즉 풍수에 따른 매장을 부활시킨다. 일본 능제에 혁명적 사건이다. 단순한 능제 변화만이 아니라 일본 임금 가문과 국운을 크게 진작시키는 사건으로 평가되었다. 중국과 일본 능을 전공한 고고학자 기타무라 다카시(來村多加史) 일본 한난대(阪南大) 교수는 말한다.

"(능제의 전환으로 인해 천황들이 매장되는 땅은) 천황가의 미래를 말해주는 도약의 땅이다. 그로부터 반세기도 되지 않은 사이에 일본은 경이적 발전을 이루었으며, 동아시아에서 맹주의 자리를 꿰찼다. 강국 일본의 상징이 된 메이지(明治)의 업적과 그의 능은 막부로부터의 해방에서 동아시아에 대한 군림으로의 전환을 구현시키고 있다."('풍수와 천황릉') 우리에게는 불편한 발언이다.

반면 같은 해에 죽은 순종의 무덤(유릉)은 어떨까? 일본인 학자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은 이곳이 거팔내팔형(去八來八形)이자 십자통기형(十字通氣形)으로 자손의 번영을 가져올 땅이라고 칭찬한다.('조선의 풍수') 거팔내팔형과 십자통기형은 같은 뜻이다. 지맥[龍]이 무덤 뒤에서 좌우로 八字 모양으로 나뉘고 무덤 앞에서 다시 거꾸로 팔자 모양으로 모여 마름모꼴이 되는 것을 말한다.

정말 그러할까? 유릉은 지맥이 흘러가는 중간 지점, 즉 과룡(過龍)에 자리한다. 또 무덤 앞에 약간 높은 언덕이 솟은 이른바 역룡(逆龍)이 된다. 모두 풍수의 금기 사항이다. 과룡과 역룡에 터를 잡다 보니 언뜻 '내팔거팔(來八去八)'의 지세처럼 보인다. 억지 궤변이다. 왜 그런 곳을 골랐을까? '일제가 조선 황실의 부흥을 막기 위해 망지를 골라 썼다'는 음모론이 나온다. 실은 망국 황족에게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이미 예정된 일이었다. 일본이 19세기 후반 '능과 국운'에 대해 새로운 문제의식을 가질 때 동시대 조선 풍수사들은 잡술에 매몰되어 있었다. 실학자들이 비난했던 것도 이러한 행태였다. 여말선초 무학과 하륜 같은 풍수 대가들이 건국과 통치 이념으로 풍수를 활용했던 유풍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망국의 슬픈 기록을 읽는데 유릉과 덕혜옹주 무덤만 한 곳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