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2016-12-14 03:00:00
박경 교수, 고문서학회 학술대회서 자기비첩 소생 노비에 관한 조선시대 법-운용 연구 발표
양반이 자기 여종을 첩으로 삼아 자식이 태어나면 그 자식의 신분도 노비다. 주인은 그 아버지이고 나중에 형제 등이 다른 재산처럼 상속하게 된다. 이들은 배다른 형제의 종이 돼 부림을 받았을까?
박경 연세대 법학연구원 연구교수는 10일 한국고문서학회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조선 전기 자기비첩(自己婢妾) 소생 사환(使喚·노비로 부리는 일)에 대한 인식’에서 이 같은 상황을 막기 위한 조선의 법과 운용에 관해 연구 내용을 밝혔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양반의 자기비첩 소생은 종량(從良·여종이 낳은 양인의 아이는 양인이 되도록 함)하도록 했다. 태종 때에는 할아버지의 비첩 소생, 즉 4촌까지는 종으로 부리지 못하게 했고, 다시 모든 양인 남성과 천민 여성 사이의 소생을 양인으로 삼도록 했다. 박 연구교수는 “같은 부계 핏줄로 동기(同氣)를 이어받은 골육(骨肉)을 차마 일반 노비와 같이 부릴 수 없다는 논리였다”며 “위정자들이 부계 중심적 가족질서를 지향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세종 때는 법 적용 대상이 관원과 일부 양인들의 천처첩(賤妻妾) 자녀로 좁아지기도 했다. 이와 별개로 타인이 소유한 여종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은 소유주가 타인이어서 종량하려면 몸값을 지불해야 했다.
문제는 절차였다. 종량을 하려면 신고를 해야 했는데 그 권한이 아버지, 적모(嫡母·아버지의 정실부인), 적(嫡) 동생 등으로만 규정돼 이들이 신고하지 않으면 그 집안의 노비로 남아야 했다.
노비를 관장하던 장례원(掌隸院)은 성종 대에 들어 이런 폐단을 개선하기 위해 절차를 개선하면서 부, 조부의 비첩 자녀를 부리는 일을 골육을 해치는 일, 즉 ‘잔상골육(殘傷骨肉)’이라고 표현했다.
박 연구교수에 따르면 이 표현은 이후 항간에서 ‘골육상잔(骨肉相殘)’으로 변하고, 4촌까지의 근친을 부리는 일을 제한한 법과 달리 5, 6촌을 부리는 일까지 금기시된다. 이에 따라 명종 시기에는 5, 6촌은 노비로 부릴 수 있게 한다는 수교가 반포되기도 했다.
박 연구교수는 “당시 소송 기록을 분석해 보면 부자나 형제 등 같은 혈족이 서로 싸운다는 ‘골육상잔’은 골육을 부리는 일을 금지하는 법을 상징하는 용어로 정착했다”며 “유교적 질서의 구축 과정에서 가족 간의 윤리가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보여 준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양반이 자기 여종을 첩으로 삼아 자식이 태어나면 그 자식의 신분도 노비다. 주인은 그 아버지이고 나중에 형제 등이 다른 재산처럼 상속하게 된다. 이들은 배다른 형제의 종이 돼 부림을 받았을까?
박경 연세대 법학연구원 연구교수는 10일 한국고문서학회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조선 전기 자기비첩(自己婢妾) 소생 사환(使喚·노비로 부리는 일)에 대한 인식’에서 이 같은 상황을 막기 위한 조선의 법과 운용에 관해 연구 내용을 밝혔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양반의 자기비첩 소생은 종량(從良·여종이 낳은 양인의 아이는 양인이 되도록 함)하도록 했다. 태종 때에는 할아버지의 비첩 소생, 즉 4촌까지는 종으로 부리지 못하게 했고, 다시 모든 양인 남성과 천민 여성 사이의 소생을 양인으로 삼도록 했다. 박 연구교수는 “같은 부계 핏줄로 동기(同氣)를 이어받은 골육(骨肉)을 차마 일반 노비와 같이 부릴 수 없다는 논리였다”며 “위정자들이 부계 중심적 가족질서를 지향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세종 때는 법 적용 대상이 관원과 일부 양인들의 천처첩(賤妻妾) 자녀로 좁아지기도 했다. 이와 별개로 타인이 소유한 여종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은 소유주가 타인이어서 종량하려면 몸값을 지불해야 했다.
문제는 절차였다. 종량을 하려면 신고를 해야 했는데 그 권한이 아버지, 적모(嫡母·아버지의 정실부인), 적(嫡) 동생 등으로만 규정돼 이들이 신고하지 않으면 그 집안의 노비로 남아야 했다.
노비를 관장하던 장례원(掌隸院)은 성종 대에 들어 이런 폐단을 개선하기 위해 절차를 개선하면서 부, 조부의 비첩 자녀를 부리는 일을 골육을 해치는 일, 즉 ‘잔상골육(殘傷骨肉)’이라고 표현했다.
박 연구교수에 따르면 이 표현은 이후 항간에서 ‘골육상잔(骨肉相殘)’으로 변하고, 4촌까지의 근친을 부리는 일을 제한한 법과 달리 5, 6촌을 부리는 일까지 금기시된다. 이에 따라 명종 시기에는 5, 6촌은 노비로 부릴 수 있게 한다는 수교가 반포되기도 했다.
박 연구교수는 “당시 소송 기록을 분석해 보면 부자나 형제 등 같은 혈족이 서로 싸운다는 ‘골육상잔’은 골육을 부리는 일을 금지하는 법을 상징하는 용어로 정착했다”며 “유교적 질서의 구축 과정에서 가족 간의 윤리가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보여 준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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