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최근 꿈과 인내를 떠 오르게 하는 또 한 사람을 만날 기회를 가졌다. 중학교 2학년 때 이모로부터 선물받은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며 사진작가를 꿈꿔온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다른 직업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이흥렬 작가(52). 그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뒤늦게나마 원하는 것을 이루려고 시도하는 변신도 아름답지만, 일찌감치 꿈을 정하고 오랜 세월 한결같이 인내하며 단련하는 경우 또한 감동을 준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먼저 초등학교 시절의 기억이다. 천둥번개와 함께 억수로 비가 쏟아지던 어느 여름날, 소년 이흥렬은 고목 아래 서낭당 근처를 지나다가 평생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한다. 천둥, 번개, 비, 고목을 배경으로 서낭당에 걸려 있던 할머니 사진이 그에게 아주 ‘그로테스크(grotesque)’한 느낌을 전해 주었다.
이후 이 고목을 보면 여자의 이미지가 오버랩 되어 떠오르곤 했다. 이때의 강렬한 기억은 이태리 유학시절 열었던 전시회 ‘누드가 있었다 그리고…’에 출품했던 ‘겨울’이라는 작품에 아주 잘 표현돼 있다. 유학하던 시절 집 근처 나무와 이태리 여학생을 찍어 암실에서 합성한 작품이다. 이 작품이 탄생하기까지 사진을 전공하고 그 이미지를 찍어보자고 결심한 이후 10년이 걸렸다고 한다.
![어린 시절의 강렬한 기억을 테마로 찍은 작품 '겨울'. [사진 이흥렬]](http://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712/02/dd2688b2-1b68-48e9-8ffa-e7d203bc13c5.jpg)
어린 시절의 강렬한 기억을 테마로 찍은 작품 '겨울'. [사진 이흥렬]
다음은 이태리에서 귀국한 후의 기억이다. 서울 강남 양재천을 좋아해 근처에 작업실을 얻어 작품활동을 하던 어느 날 뚝방길을 산책하다가 몇 백 그루의 나무에 꼬리표가 달려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근처에 아파트를 지으면서 간선도로를 내기 위해 나무를 모두 자르고 이 아름다운 길을 없앨 계획이라는 사실을 알게됐다. 워낙 좋아하던 길이라 아쉬웠지만 사람이 다닐 도로를 낸다는데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양재천 뚝방 길 나무 구명운동
하지만 구의원들을 만나 실상을 알게 됐고, 교통운수과의 시뮬레이션 결과도 역시 주 도로인 강남대로의 상습적인 교통체증으로 인해 간선도로의 교통흐름이 전혀 빨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사회운동이나 시민운동에 적극적인 편은 아니었지만, 아름다운 나무와 길을 지키기 위해 서명운동을 하고 공청회에 나가 모두발언을 하는 등 열심히 뛴 결과 나무들을 지켜낼 수 있었다. (간선도로 계획은 건너편 양재시민의 숲 밑으로 터널을 뚫는 것으로 변경돼 최근 공사를 개시했다고 한다)
!['양재천 뚝방길 나무 지키기 운동'으로 이끈 꼬리표 달린 나무들. [사진 이흥렬]](http://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712/02/9f5d3d88-ce8f-4d02-b9c3-10eccefbeb00.jpg)
'양재천 뚝방길 나무 지키기 운동'으로 이끈 꼬리표 달린 나무들. [사진 이흥렬]
![전시회 '푸른나무'에 출품한 양재 플라타너스 숲. [사진 이흥렬]](http://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712/02/5f230c87-de70-4660-870b-ded79a361a70.jpg)
전시회 '푸른나무'에 출품한 양재 플라타너스 숲. [사진 이흥렬]
나무와의 이러한 인연이 계기가 되어 이후 개최한 전시회의 제목을 ‘푸른 나무’로 붙이고 본격적인 예술사진 전업작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전국의 아름다운 나무를 찾아 푸른 조명을 주어 그 자태를 더욱 부각시켜 작품에 담아냈다. 이태리 유학시절 패션쇼 무대에서 조명을 받아 빛나던 모델들에서 영감을 받아 나무를 무대 위의 주인공처럼 보여주고 싶었다. 이후에는 시선을 나무에서 숲으로 옮겨 관객들에게 선보였다.
![2013년 전시회 '푸른나무' 출품작(제주). [사진 이흥렬]](http://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712/02/2598f16b-b9f8-4c20-a0a2-e7daad9fb400.jpg)
2013년 전시회 '푸른나무' 출품작(제주). [사진 이흥렬]
이전까지 조용히 개인적인 예술활동을 하던 이 작가는 ‘양재천 뚝방길 나무 지키기 운동’을 통해 여럿이 힘을 합치면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사실도 몸소 체험할 수 있었다. 이 경험은 작지만 의미있는 변화를 그에게 선물해 줬다. 바로 ‘한국시각예술인협동조합’을 결성하고 초대 이사장을 맡은 것이다.
이 작가와 조합원들은 ‘예술의 숲’이란 이름을 붙인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100만 평 정도의 국유림을 장기 임대해 그 안에 작가들의 활동공간, 전시공간, 대안예술학교 등을 조성할 계획이다. 이러한 과정의 일환으로 2016년엔 경기도교육청과 함께 방과후학교 프로그램으로 사진, 그림, 디자인 등을 가르쳐 주는 ‘꿈의 학교’를 운영해 큰 호응을 얻었다. 또 강원도교육청과 손을 잡고 조합의 사진가, 디자이너 등 예술가들과 함께 조합 부설 출판사에서 초등학교 졸업생과 재학생들에게 졸업앨범을 제작해 선물해 좋은 반응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2016년 전시회 '숲' 출품작(담양 메타세콰이어). [사진 이흥렬]](http://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712/02/f96bf9e9-23fc-463e-bd75-4792c2230b56.jpg)
2016년 전시회 '숲' 출품작(담양 메타세콰이어). [사진 이흥렬]
어린 시절 나무와 특별한 인연은 나무 지키기 운동, 나무와 숲을 테마로 한 전시회, 예술의 숲 조성 등으로 이어져 왔다. 그는 나무 덕분에 순수예술을 하는 사진작가로서는 작지 않은 변화를 경험할 수 있었기에 감사하다고 담담하게 말한다. 현재 ‘꿈꾸는 나무’라는 제목으로 또 하나의 나무사진 전시회를 열고 있다(11월 29일~12월 9일, 아트스페이스 호서). 나무에서 숲으로 옮겨간 시선을 이제 다시 나무로 옮긴다.
그런데 이번에는 나무의 외양이 아닌 내면을 향하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 향 등을 표현하기 위해 촬영한 사진에 그림을 더하는 실험적인 시도를 했다. 이를 통해 자연 속에 서 있는 나무의 보이지 않는 내면까지 표현해 봤다고 한다. 30여 년간 정통 사진만을 고수해 온 그로서는 용기있는 변화가 될 것이다.
그의 인생스토리를 들으며 가슴에 스며든 ‘나무와 꿈’의 이미지를 고려하면 당연히 보여줄 수 있는 한 걸음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2017년 전시회 '꿈꾸는 나무' 출품작(가을밤 사과나무). [사진 이흥렬]](http://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1712/02/741729e3-5239-4d93-9392-f5caa8080e21.jpg)
2017년 전시회 '꿈꾸는 나무' 출품작(가을밤 사과나무). [사진 이흥렬]
이승엽 선수는 야구선수라는 꿈을 정하고 수 많은 어려움을 인내하며 결국 최고의 선수로 은퇴했다. 야구선수라는 큰 틀은 일본프로야구 진출, 올림픽 금메달, 최다 홈런기록 경신 등 다양한 작은 꿈들이 완성해주었다. 야구선수로서 끝이 났으니 또 새로운 꿈을 꿀 것이다. 이흥렬 작가도 사진작가라는 꿈을 정하고 역시 수 많은 고비를 넘기며 지금까지 꿈을 이뤄 왔다.
사진작가라는 큰 꿈이 이태리 유학, 여러 작가활동, 나무 작가 등 기대하지 않았던 작은 꿈들로 채워지고 있다. 야구선수와는 달리 사진작가는 은퇴가 없다. 이작가는 ‘예술의 숲 조성’이라는 꿈이 이뤄져도 계속 사진작가로서, 예술가로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역할을 찾아갈 것이라고 한다. 우선 그가 만들 ‘예술의 숲’을 빨리 보고 싶다. 한 사람의 팬이자 서포터로서 응원하고 도울 것이다.
이상원 밤비노컴퍼니 대표·<몸이 전부다> 저자 jycys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