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2018.04.30 박해현 문학전문기자)
[예언서로 추종자 동원한 이야기, 이문열 '황제를 위하여' 다시 주목]
"드루킹 같은 인물은 언제든 생겨…
그냥 '미친 사람'으로 봐서는 안돼…
現정권이 이용했는지 여부 따져야
中·러시아가 '황제' 옹립한 것도 인터넷 통제·조작 가능하기 때문"
소설가 이문열(70)의 장편 소설 '황제를 위하여'(민음사)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1980년 계간 '문예중앙' 연재를 통해 발표된
이 소설은 정감록(鄭鑑錄)을 신봉해 '황제'를 자칭한 인물과 그 추종 집단이 개국(開國)을 꿈꾸며 벌이는
희극(喜劇)이다. 다시 세간의 화제가 된 건, 요즘 정가를 휩쓰는 '민주당원 댓글 조작' 사건과 맞물려서다.
댓글 조작의 주범 드루킹(본명 김동원)이 인터넷 논객으로 활동하면서 조선시대 예언서 '송하비결(松下秘訣)'로
추종자를 모아 현실 변화를 꾀한 과정이 소설 '황제를 위하여'와 유사하다.
지난 26일 경기도 이천 자택에서 이문열과 이야기를 나눴다.
소설가 이문열은 “드루킹은 사회 변화를 해석한 게 아니라 현실의 변화를 텍스트(예언서)에 적용해
지지자들을 한 방향으로 몰아갔다”고 말했다. /이진한 기자
―드루킹은 2009년부터 인터넷 블로그를 통해 '송하비결'로 정치·사회적 변화를 예언하면서 세력을 모았다고 한다.
"최첨단 인터넷 기술을 악용한 사람과 '송하비결'이라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다.
예언서를 믿는 사람은 현실에 일어난 결과를 놓고 예언서의 자구(字句)를 갖다 붙이기 마련이다.
드루킹이 지난해 대선을 놓고 예언하려고 인용했다는 '송하비결'에서 '해룡기두(海龍起豆)'는 이미 여러 차례 써먹은 것이다.
해룡, 바다의 용이 일어난다는 것인데, 김대중(목포)·노무현(부산)·이명박(포항) 전(前) 대통령이 다 정치적으로 바닷가
출신이고, 문재인 대통령도 부산 아닌가."
―드루킹은 예언서로 지지자를 모아 현실 변혁을 추구했고, 공동체의 이상향을 담은 '두루미 마을'도 운영하려고 했다. 조선시대 후기에 '정감록' '격암유록' '송하비결' 같은 예언서가 성행했는데, 요즘도 한국 사회에서 '정감록'같은
예언서가 먹히는 까닭은 무엇이라고 보나.
"혼돈의 시대, 대중은 변화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드루킹 일당이 옛날 예언서를 갖다 놓고 그냥 해설만 했느냐,
아니면 지금 현실에서 뭘 하려고 하는 원안(原案)이나 로드 맵을 작성한 게 아니냐 그걸 따져봐야 한다.
드루킹 같은 인물은 언제든 생겨날 수 있다.
과거의 '의적'이나 '비밀결사'를 표방한 집단이 요즘 시대에도 생길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다."
―역사서 '정감록 역모 사건의 진실 게임'을 보면 영·정조 시대에 유난히 예언서가 성행했다고 한다.
그 당시 평민 중에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늘어나고 출판물도 증가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드루킹은 인터넷과 소셜미디어가 일으킨 사회·문화적 변화를 자기 방식으로 이용한 것이다.
옛날 예언서는 누가 지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정감록'은 정여립 패거리가 먼저 지었다는 설이 있고,
나중에 그 사건을 지지하는 사람이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드루킹 사건도 기존 예언서를 활용했지만, 그 해석은 드루킹 일당이 지어낸 오늘의 예언서가 된 셈이다. '
예언서에 이런 말이 있다. 그러니 이리 가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여전히 '정감록'류의 예언서 문화가 우리 사회에 남아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예언서는 구체적인 날짜가 아니라 간지(干支)를 내세워 어떤 사건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60년에 한 번 나오는 사건이라며 특정 해에 맞춰 제 마음대로 해석할 수 있으니 악용하기 쉽다.
가령 '정감록'에서 '인천에 하룻밤에 수천 척의 배가 들어오고'라는 문장은 먼 훗날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을 내다본
예언으로 뒤늦게 풀이되는 식이다.
일제강점기 초기에 만주와 하얼빈 지역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정감록'을 바탕으로 갈 곳을 정한 경우도 있다."
―드루킹 사건을 놓고 '개인의 일탈 행위'로 몰아가는 주장도 있다.
"그냥 미친 사람으로 몰아붙여서는 곤란하다. 이쪽(문재인 캠프)에서 고의적으로 활용했나 안 했나 그걸 따져야지.
정치적 부담을 덜기 위해 이 사람을 이상하게 만들어가는 게 아닌가 싶다.
드루킹은 여론 조작에 그치지 않고 나름 '송하비결'을 실현하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인터넷 여론몰이로 고생한 작가로서 이번 사건을 어떻게 느꼈나.
"내가 2003년에 '디지털 포퓰리즘'에 대해 썼다. 댓글과 인터넷 조작을 걱정했는데, 그때는 대충 어눌하게 말했다.
이제 우리 현실이 됐다. 디지털 포퓰리즘이 가장 불행한 방법으로 우리 사회를 점령해가고 있다."
―디지털 포퓰리즘 시대에 필요한 지혜는 무엇일까.
"인터넷 여론을 믿지 말라. 전 세계적 현상이다.
중국과 러시아가 지금 저마다 황제를 옹립한 것은 인터넷을 통제하고 조작했기 때문이다.
미국 대선도 마찬가지다.
이른바 '샤이 트럼프'라고 불리는 트럼프 지지층은 인터넷 여론 조작이 만들어낸 것이다."
소설 '황제를 위하여'는 황제를 위하여. 1 & 2 이문열 장편 '황제를 위하여'는 '정감록'을 패러디해 한국 근현대사를 뒤집어본 소설이다. '정감록'은 '이씨 망하고 정씨가 흥하리라'며 조선 왕조가 망하고 정씨 왕조의 개국을 주장한 예언서로, 조선 후기 이후 성행했고 정조 9년(1785년)에 '정감록 역모 사건'이 터지기도 했다. 소설은 갑오년(1894년) 계룡산에서 탄생한 '정씨(鄭氏) 황제'와 그를 추종한 집단이 일제강점기를 거쳐 1972년까지 활동한 이야기를 전한다. '정감록'의 예언에 따라 '남조선국(南朝鮮國)'을 세운 황제와 그 부하들이 군주제를 외치며 동양의 이상 사회를 건설하려고 했지만, 역사의 격변기에 치이고 사교 집단으로 몰려 뜻을 펴지 못한다는 기록이 서술된다. 잡지사 기자인 '나'가 계룡산 취재 도중 우연히 입수한 '백제실록(白帝實錄)'을 구해 한글로 풀어낸 형식. 실존하지 않는 위서(僞書)를 바탕으로 전개한 허구다. 소설은 '제왕의 핏줄기는 범인(凡人)과 달라…'라는 의고체 문장으로 황제의 황당무계한 기록을 베끼지만, 곧 현대적 해설로 그 기록을 뒤집어 조롱한다. 이문열은 "중국 고사를 대거 인용해 근대사를 그릴 생각이었는데 우연히 리어카에서 천원에 팔던 '정감록'을 구해 읽곤 소설에 덧붙였다"고 회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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