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2018-01-31 03:00
한 폭의 그림이 세상사에 지친 사람들을 다독이고 위로할 때가 있다. 그 기능을 한다는 말은 그림에 그럴 만한 힘이 있다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벚꽃 위의 새’는 어떤 힘을 갖고 있는 걸까.
그림을 보면 화가 이중섭의 작품을 통틀어 가장 차분해 보이고, 이보다 더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부드러운 파스텔 톤의 색조 위에 펼쳐진 아름다운 세계가 우리를 반긴다. 꽃들이 만개한 벚나무 가지 위에 막 내려앉은 흰 새, 새가 내려앉은 충격에 후드득 떨어지는 꽃잎들, 생김새로 보아 벚꽃이 아니라 복숭아꽃 같지만 아무런들 어떠랴, 벌써 저만큼 달아난 노랑나비, 화들짝 놀라서 엉덩이를 뒤로 빼고 휘둥그레진 눈으로 새를 쳐다보는 청개구리.
그럴 리는 없겠지만 초성, 중성, 종성을 결합해 ‘중섭’이라 하지 않고 그것들을 일렬로 늘어놓은 화가의 서명(ㅈㅜㅇㅅㅓㅂ)마저도, 그림의 한 부분인 듯 평화롭고 평온해 보인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청개구리가 가지 위에 먼저 앉아 있었고 새가 나중에 내려앉은 것처럼 보인다. 몸집이 10배쯤 더 큰 새의 부리 모양으로 보아, 새는 청개구리가 보내는 힐난의 눈길(‘놀랐잖아!’)에 이렇게 앙알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왜 그러는 거야, 앉느라고 그런 건데!’
현실 속에서라면 이 상황에서 청개구리는 새한테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도망을 쳤겠지만, 여기에는 먹이사슬의 폭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동물과 식물과 인간이 평화롭게 공존하고 아이들이 게나 잉어와 어울려 놀며, 화가가 소이고 소가 화가일 수 있는 순수의 세계니까.
화가가 이 그림을 그린 것은 1954년, 즉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이었다. 아내와 아이들이 가난 때문에 3년 전 일본으로 건너간 탓에 심리적으로도 불안정하고 주거도 불안정한 상태였다. 현실은 그림이 보여주는 평온함으로부터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다. 그러나 현실이 아무리 가혹하고 불행한 것이었어도, 그것이 그림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화가는 현실에 지배당하지 않았다.
왕은철 문학평론가·전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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