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고전·고미술

정민의 세설신어 [7] 다산의 학술논쟁

바람아님 2013. 12. 8. 10:14

(출처-조선일보 2009.06.11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서울 종로구 인사동 공화랑에서 10일부터 조선시대 서화감상전 〈안목(眼目)과 안복(眼福)〉전이 열리고 있다. 이 전시에 다산 정약용 선생의 친필 서화 다섯 점이 처음 공개되었다. 필자는 전시에 앞서 이들 작품을 검토하는 안복을 누렸다. 이 중 16장 32쪽에 달하는 〈송이익위논남북학술설(送李翊衛論南北學術說)〉이란 글이 흥미로웠다. 옷감과 종이를 잘라 써내려 간 다산 특유의 필치도 압권이지만, 내용이 더 인상적이었다. 1822년 다산이 61세 때 쓴 글이다.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관원을 지낸 이익위(李翊衛)는 영남의 남인이었다. 그는 65세 때 낙향하는 길에 두릉(杜陵)의 여유당으로 다산을 불쑥 찾았다. 두 사람은 22년 만에 감격적으로 재회했다. 반가운 해후 끝에 화제가 공부 이야기로 옮아갔다. 포문은 이익위가 먼저 열었다. 그는 서울의 학자들이 이 책 저 책 잡다하게 엮고 편집하여 장황하게 꾸미기만 할 뿐 마음의 실지 공부에는 등한한 것이 문제라며 은근히 다산을 겨냥했다.

다산도 이를 맞받아 

당시 영남의 학풍을 매섭게 비판했다. 자기 생각과 조금만 다르면 무조건 배척한다. 

기세를 돋우지만 억지가 많고, 따져 보면 같은 얘기다. 

든 것도 없이 선배를 우습게 본다. 

오가는 말은 날카롭고, 마음 씀은 험하다. 

한편이면 어울리고, 다른 편이면 함정에 빠뜨린다. 

번번이 자신만 옳다며 남을 꺾으려 든다. 

결국은 한 집안끼리도 서로 물고 뜯고 싸우는 지경이 되었다. 모두 젊은이들의 객기 탓이다. 

이를 해결하려면 덕 높은 선생이 단 위로 올라가 꽹과리를 치면서 한 번만 더 남을 헐뜯고 비방하면 아녀자로 취급하기로 

약속하고, 양측 대표가 도산서원을 찾아가 퇴계 선생의 위패 앞에 나란히 배알하고 다시는 싸우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다산은 이런 신랄한 비판을 글로 써주며, 영남의 가까운 벗들과 토론해 볼 것을 제안했다. 서첩 끝에는 이익위가 쓴 발문(跋文)이 붙어 있다. 그는 발끈하는 대신 다산의 비판을 조목조목 짚고 나서, 서로 더욱 힘써서 노력하자는 말로 글을 맺었다. 당당히 제 주장을 펴고, 남의 비판을 '쿨'하게 받는 두 사람의 구김 없는 태도가 흔쾌했다. 막상 다산이 지적한 병통들은 지금도 우리 사회 전반에 팽배한 문제점이 아닌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다시 마음이 답답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