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09.06.18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기(機)는 목(木)과 기(幾)를 합한 글자다. 복잡한 장치로 된 기구를 말한다. 원래는 쇠뇌를 발사하는 방아쇠를 뜻했는데, 나중에는 이런저런 기계장치를 가리키는 말로 썼다. 이 글자가 들어간 어휘를 보면 대부분 이것과 저것이 나뉘는 지점과 관련된다. 기계장치에 방아쇠를 당기면 순간적으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다. 변화는 예측이 어렵다. 선택의 기로에서 어떤 판단을 하느냐가 성공과 실패를 가른다.
기(機)는 미세해서 기미(機微)요, 비밀스러워서 기밀(機密)이다. 하늘의 기밀은 천기(天機)니 이것은 함부로 누설하면 안 된다. 기를 잘못 다루면 위험해서 위기(危機)가 온다. 하지만 이 기가 모여 있는 지점은 기회(機會)의 순간이기도 하다. 기지(機智)가 있는 사람은 위기를 기회로 만들고, 실기(失機)하면 기회는 금세 위기로 된다. 그래서 사람은 기민(機敏)하게 판단해서 임기응변(臨機應變)을 잘해야 한다. 임기응변(臨機應變)은 흔히 쓰듯 그때그때 적당히 임시방편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다. 잘 나가다가 갈림길을 만나 선택을 해야 할 때, 그 상황에서 가장 알맞은 선택을 하는 것이다.
사람은 때로 진득하니 대기(待機)할 줄도 알아야 하고, 기의 방향을 돌려 전기(轉機)를 마련하는 여유도 필요하다. 그러려면 적절한 계기(契機)에 기선(機先)을 제압해야 한다. 투기(投機)는 내 기회를 한꺼번에 던지는 것이다. 특히 기략(機略)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어떻게 하면 내게 이로운 수가 생길까 궁리하는 마음은 기심(機心)이다. 옛 선비들은 기심 버리는 것을 큰 공부로 알았다. 그것이 망기(忘機)다. 섣불리 기교(機巧)만 부리려 들면 제 몸을 망치고 집안을 망친다. 추기(樞機)는 문을 여닫는 장치인 지도리다. 지도리가 뻑뻑하면 문이 안 열린다. 가톨릭의 추기경(樞機卿)은 교회의 중요한 일을 열고 닫는 결정권을 지닌 존재다. 군대의 기밀을 담당하는 기관은 기무사(機務司)다.
뜻밖에 우리 생활 주변에 기가 들어간 한자 어휘가 많다. 어찌 보면 현대인의 경쟁력은 결국 이 기(機)의 장악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자는 이렇듯 한 글자만 제대로 알아도 파생되는 의미가 무궁하다. 급수를 나누는 한자 검정시험은 낱글자를 익히는 데만 치중하다 보니, 한자 어휘의 이런 연쇄적 의미 사슬을 흔히 무시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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