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09.06.25 정민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사랑채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자던 소년은 새벽마다 목청을 돋워 읽으시던 고문의 가락을 들었다. 눈을 감으면 그 소리는 어제 들은 듯 새록새록 평생을 따라다녔다. 구순의 한학자 손종섭 선생께서 들려주신 이야기다. "'백이열전' 읽은 것을 직접 녹음해두고, 밥 먹을 때도 듣고 책 보면서도 들었지. 자꾸 듣다 보면 글이 저절로 외워졌어. 의미는 늘 소리를 뒤따라왔네. 소리를 내서 읽어보면 대번에 좋은 글인지 나쁜 글인지 알 수가 있지. 좋은 글은 글자 하나하나가 빳빳이 살아 있고, 나쁜 글은 비실비실 힘이 없어 읽어도 소리가 붙질 않는다네." 지금은 병상에 누워 계신 김도련 선생께서 말씀해주신 고문을 외우던 방법이다.
밤낮없이 낭랑하게 들려오는 옆집 총각의 책 읽는 소리에 마음이 설레 담을 뛰어넘은 처녀들의 이야기는 옛 글 속에 심심찮게 나온다. 꿈 많은 사춘기 소녀에게 울타리 너머 목소리의 주인공이 왜 궁금하지 않았겠는가? 아이들은 부모가 읽어주는 동화책에서 모국어의 리듬을 처음 익힌다. 동서양 할 것 없이 책은 으레 소리를 내서 읽는 것이었다. 묵독(默讀)은 요사스러운 행위로까지 생각되었다.
산사(山寺)에 틀어박혀 아랫배에 힘을 주고 삼동(三冬) 내내 책만 읽다가 내려온 젊은이는 눈빛이 반짝반짝 빛났다. 글을 지으면 겨우내 읽은 가락이 절로 붓끝을 타고 흘렀다. 글공부에서 소리 내서 읽는 것보다 좋은 방법이 없다. 들숨 날숨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타면 좋은 글이다. 자꾸 꺽꺽하게 분질러지거나 목에 걸리면 나쁜 글이다.
몇 해 전 일본에서는 '소리를 내서 읽어보는 일본어'라는 책이 몇백만 부나 팔려나갔다. 일본에 들른 길에 구해 보니 3책을 한 세트로 이름난 문장을 가려 뽑아 성우와 유명배우들이 낭독한 CD가 함께 들어 있었다. 우리말과는 사뭇 다른 일본어의 가락이 친숙하게 다가왔다. 우리도 '관동별곡'이나 '3·1 독립선언문', '소나기' 같은 작품을 녹음하여 글과 함께 들려주는 책이 나온다면 크게 환영을 받을 것 같다.
책 읽는 소리를 좀체 들을 수 없더니, 전국에서 낭독성이 커져간다. 무척 반갑고 고마운 현상이다. 낭독은 모국어의 가락을 익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다. 집집마다 책 읽는 소리가 들려오는 광경은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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