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學,藝術/고전·고미술

정민의 세설신어 [15] 파초설(芭蕉說)

바람아님 2013. 12. 17. 08:47

(출처-조선일보 2009.08.06. 한양대 교수·고전문학)


이태준의 수필집 《무서록》에 '파초'란 글이 있다. 여름날 서재에 누워 파초 잎에 후득이는 빗방울 소리를 들을 때 '가슴에 비가 뿌리되 옷은 젖지 않는 그 서늘함'을 아껴 파초를 가꾸노라고 썼다. 없는 살림에도 소 선지에 생선 씻은 물, 깻묵 같은 것을 거름으로 주어 성북동에서 제일 큰 파초로 길러낸 일을 자랑스러워했다. 앞집에서 비싼 값에 사갈 테니 그 돈으로 새로 지은 서재에 챙이나 해 다는 것이 어떻겠냐 해도, 챙을 달면 파초에 비 젖는 소리를 못 듣는다며 들은 체도 않았다. 당시까지만 해도 서울에서 파초 기르는 것이 꽤 유행했던 모양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파초 사랑도 유난했다. 파초는 남국의 식물이다. 겨울을 얼지 않고 나려면 월동 마련이 여간 성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폭염 아래서 파초는 푸르고 싱그러운 그늘로 초록 하늘을 만들어 눈을 씻어준다. 그래서 파초의 별명이 녹천(綠天)이다. 이서구(李書九)의 당호는 '녹천관(綠天館)'인데, 집 마당의 파초를 자랑으로 여겨 지은 이름이다.

옛 선비들은 파초 잎에 시를 쓰며 여름을 나는 것을 운치 있는 일로 쳤다. 여린 파초 잎을 따서 그 위에 당나라 왕유(王維)의 '망천절구(輞川絶句)'시를 쓴다. 곁에서 먹 갈던 아이가 갖고 싶어한다. 냉큼 주면서 대신 호랑나비를 잡아오게 해 머리와 더듬이, 눈과 날개의 빛깔을 찬찬히 관찰하다가 꽃 사이로 불어오는 산들바람을 향해 날려 보낸다. 이덕무(李德懋)의 《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에 나오는 아름다운 광경이다.

이런 운치 말고도 옛 선비들이 파초를 아껴 가꾼 것은 끊임없이 새 잎을 밀고 올라오는 자강불식(自彊不息-스스로 힘써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 쉬지 아니함)의 정신을 높이 산 까닭이다. 
송나라 때 학자 장재(張載)는 파초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파초의 심이 다해 새 가지를 펼치니, 새로 말린 새 심이 어느새 뒤따른다. 
새 심으로 새 덕 기름 배우길 원하노니, 문득 새 잎 따라서 새 지식이 생겨나리
(芭蕉心盡展新枝, 新卷新心暗已隨. 願學新心養新德, 旋隨新葉起新知)." 
잎이 퍼져 옆으로 누우면 가운데 심지에서 어느새 새 잎이 밀고 나온다. 공부하는 사람의 마음가짐도 늘 이렇듯 중단 없는 노력과 정진을 통해 키가 쑥쑥 커 나가는 법이다. 수능이 백일도 안 남았다. 지치기 쉬운 여름철, 수험생들의 건투를 빈다.